아주 평범한 어떤 사람들에게 있을 수 있는, 우울하고 슬픈 일이지만, 다시 태어난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읽은 후 내 경험을 그대로 숨김없이 쓰려고 한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의 악몽 같은 삶이 순식간에 천국으로 변하는 것에 대해서,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은 믿을 수 없을 것이다. 나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1997년 12월 고향 사람인 상찌드 아저씨의 러시아제 트럭질130 6톤 화물차 짐칸에 게르를 실었다. 오랜 세월에 낡아 버려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양털로 만든 덮개와 흉하게 구부러진 게르 지지대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가죽 끈으로 묶여 있었다. 흙먼지가 덕지덕지 붙은 낡고 때가 탄 우리 집, 게르를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트럭에 싣고 있었다.
누추해도 집은 집이다라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시던 어머니는 “이봐 거기 살살 좀 올려, 묶은 끈들이 모두 끊어지겠어” 라며 놀라 소리를 치셨다. 이렇게 트럭에 짐을 모두 싣고 그 위에 앉은 우리 가족은 으문고비 달란자뜨가드 솜행정구역명칭군에해당에서 몽골의 수도 올란바타르市로 출발하게 되었다.
그때 우리를 전송할 친척은 누구도 나오지 않았다. 단지 내가 살던 곳의 신비스러운 ‘고르응 사이항’ 산(山)만이 우리 가족에게 먼 길을 잘 가라며 배웅하는 것처럼 보였다. 언제나 그곳에 있어 잘 몰랐지만 고향을 떠나는 순간 다시 보니 더욱 아름다웠다. 어머니는 속으로 자식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까 생각하시며 우리 남매들을 물끄러미 번갈아 바라보시고 덜컹거리며 달리는 트럭에 불편하게 앉아 계셨다. 웅웅거리는 차 소리 말고는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말없이 앉아 있던 우리들에게 어머니는 ‘고르응 사이항’ 산에 얽힌 전설을 이야기 해주셨다. 전에도 몇 번 들었지만 나는 처음 듣는 것처럼 귀를 기울여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었다.
향나무 냄새 나는 맑고 투명하게 흐르는 강물, 상큼하고 깨끗한 공기, 산양(山羊)이 때를 지어 풀을 뜯는 고르응 사이항 산은 메마르고 건조한 고비지역 가운데서 울창하고 풍요로운 곳이라고 이름이 붙을 만한 곳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고향을 운명 때문에 버려야 했던 우리 가족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난 뒤 우리 가족의 생활은 너무도 달라졌다. 어느새 굶주림, 병마, 가난들이 우리 가족을 덮쳤다. 어머니는 밭에서 여름 내내 일을 했고 나는 어머니를 도왔다. 그 해 누나는 대학생이 되었고 어머니는 어떻게 해서든지 학비를 마련하고자 하는 일념에 몸이 부서지도록 일을 했다. 올란바타르에 사는 친척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누나를 대학교에 보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도시 근처라도 가게 된 것이다.
달란자뜨가드에서 트럭으로 이틀을 달려 올란바타르市가 멀리 바라보이는 동네인 바양허쇼에 어머니의 오랜 친구집 마당에 게르를 세웠다. 우리 남매는 도시에 온 것에 마냥 기뻐서 ‘이거 볼래, 저기로 가 볼래’ 라며 들떠 있던 것이 지금도 기억이 남는다. 그 때 이후 시간은 쏜살 같이 빠르게 지나갔다. 하지만 내 어머니의 건강은 하루가 다르게 나빠졌고 집안에 돈이 될 만한 것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내가 7학년14-15세이었을 때 누나는 대학교 졸업반이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친구들 모임, 생일, 송년회 등 행사가 있을 때 마다 어떤 옷을 입자, 돈을 얼마씩 내서 어떻게 놀까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하지만 나는 이런 대화가 나오면 조금씩 조금씩 교실 문 쪽으로 자리를 옮기다 이내 문틈으로 조용히 빠져 나가곤 했다. 같은 반 아이들은 모두 나를 학교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려 하지 않는 내성적인 사람이라고 이야기 했다. 나는 어린 학생이고 남자라 그래도 괜찮지만 ‘불쌍한 누나는 학교에서 어떻게 하나’ 생각하는 내 마음은 너무도 걱정스러웠다.
2008년 차강사르음력1월1일몽골전통설날 3일전, 우리 반 학생들은 차강사르날 친구 집을 한 집 한 집씩 방문하며 새해 인사를 다니자고 결정하고 그날 먼저 수흐바타르 광장에 모이자고 이야기 했다. 나는 집에 돌아와 어머니께 이 계획에 대해 이야기하자 매우 걱정하시며 잠시 말씀이 없으셨다가 ‘아들아 학교 친구들과 함께 지내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런데 우리 집에는 차강사르에 친구들에게 줄 만한 것이 없다. 아들아 학교 친구들에게 다음에 오라고 할 수 없겠니?” 라고 하셨다. 나도 집안 사정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이렇게 말씀 하실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차강사르 전날 밤 누나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 전부로 빵20개(몽골 설날등 특별한 날에 반드시 차려야하는 넓적하고 동그란 빵) 사탕 100그램, 시럽3봉지(물에 타서 먹는 음료수 가루), 우유 1리터를 사서 집에 돌아 왔다. 어머니는 ‘집안 잔치상은 남자가 차려야 한다’ 라며 나에게 상을 차리게 하셨다. 20개의 빵을 다섯겹으로 나누어 진열해 놓고(몽골에서는 차강사르때에는 반드시 이런 빵으로 아래에서 위로 3겹에서 9겹까지 층층으로 나이에 따라 진열하는 풍습이 있다.) 그 위에다 몇개의 사탕을 얹어 놓았다. 그때 어머니가 갑자기 우시면서 ‘내가 너희들을 이렇게 만들었다. 애미를 용서해라’ 고 한숨을 쉬시며 말씀하시자 누나는 ‘아니야 엄마,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딸이 잘 해 드리지 못했어요’ 라며 따라 울었다. 차강사르 전날에는 모든 사람들이 집안에 비어 있는 모든 곳에 곡식이나 비누, 기름등 살림살이를 가득 채워놓고 가족들과 모여 배부르게 먹는데 우리 가족만은 눈물로 차강사르 전날을 채웠다.
다음날인 차강사르날(음력1월1일) 나는 학교 친구들에게 집에 초대할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하기 위해 수흐바타르 광장에 갔더니 이미 친구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친구들은 나를 보고는 “믄드네 집으로 먼저 가자” 라는 소리를 해서 내 가슴이 답답해졌다. 내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어떻게 말을 할까?’라는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우리반 친구 수렝이 ‘자, 가자’ 며 나의 팔짱을 끼고 걸음을 재촉했다.
그때 내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들이 일어났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집에 가서 내놓을 것이 하나도 없고, 선물 줄 것도 없는데 우리 어머니는 뭐라고 생각하실까 등등. 이렇게 고민에 빠져 있는 동안 어느새 우리 집 문 앞까지 와 버렸다. 내가 집으로 먼저 들어갈 틈도 주지 않고 우리반 아이들은 서로 부딪쳐 가면서 모두 달려 들어 갔다. 집에 들간 아이들은 이내 조용해졌고 나는 문밖에 혼자 남아 있었다. 아이들이 아무 소리도 내지 않자 나는 온몸이 떨리고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할까 걱정하며 모든 것이 밝혀졌다는 생각에 친구들 얼굴을 보기가 부끄러워서 도망쳐버릴까 했지만 갑자기 “안에 엄마가 계시잖아?’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용기를 냈고 아이들 사이로 겨우 비집고 들어가 집안을 보니 어머니는 게르 맨 윗자리에 앉으셔서 친구들의 인사를 받고 계셨다. 누나는 아이들에게 음료수 잔을 나누어 주면서 나를 보고 ”믄드야, 너 왜 그냥 있어? 빨리 와서 친구들에게 과일을 나눠 주지!” 라고 하면서 “얘들아, 이리 와서 샐러드 먹어라!”라고 했다. 그런데 집안에는 많은 사탕, 과일과 샐러드가 준비되어 있어서 나는 너무 놀랐었고 또 기뻐서 ‘알았어 누나’ 라며 얼른 친구들에게 차강사르 음식과 마실 것을 주느라 정신 없이 바빴다. 많이 긴장하고 당황스럽고 부끄러웠던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나니 정말로 날아갈듯한 기분이었다. 친구들이 모두 가고 난 뒤 어디서 이런 것들을 샀는지 보다는 돈이 어디서 났는지 더 궁금했다. 하지만 어머니와 누나 누구도 이것에 대해 말해 주지 않았다.
차강사르가 지난 후에도 어머니의 건강은 더욱 나빠졌고 집안에도 돈이 될만한 것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어느 날 학교 시험 시간에 배에서 ‘꾸르륵’ 소리가 너무 크게 나서 조용한 교실에 있던 학생들이 나를 보았고 어떤 학생들은 비웃는 눈빛으로 처다 봤다. 결국 나는 배 고픔을 참지 못하고 몇 분 동안 속에서 나올 것도 없는데 헛구역질만 계속 하다가 속에 탈이 났다. 내가 이런데 어머니는 얼마나 힘드실까 라는 생각에 마음이 너무 아팠다.
2010년 3월 나는 중학교를 그만두고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누나는 학교를 다니는 것이 더 좋다라고 이야기 했지만 속으로는 일을 해서 돈을 좀 벌었으면 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사실을 어머니께는 전혀 말씀 드리지 않았다. 아침8시에 시장으로 나가 장사하는 사람들의 짐과 물건들을 날라 주었고, 틈틈이 심부름도 해주며 작은 돈이라도 받아 모았다. 또 마음씨 좋은 시장 아주머니가 나에게 손수레를 빌려 주어서 나는 그 손수레를 끌면서 사람들의 물건을 옮겨 차에 실어 주었다.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무거운 짐은 간신히 옮겼다. 그 날 나는 처음 스스로 일해서 번 돈으로 집에 빵을 사서 들어갔다.
어느 날 누나가 집에 남자 한 명을 데리고 들어왔다. 누나는 자신의 남자친구라며 어머니께 소개 하면서 ‘이사람 어때?’라는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어머니는 집에 사위될 사람이 들어왔다며 매우 기뻐하셨고 이렇게 우리 가족은 한 명이 더 늘었다. ‘앞으로 한 사람 더 돈을 벌 수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점점 더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날이 많아지며 누나한테 술주정을 했다.
하루는 시장 일이 끝나고 집에 들어 오자 누나의 남자친구가 술주정을 하며 누나를 때리고 있었고, 어머니는 병석에 누워계셨기 때문에 말리지도 못하고 “그러지 말아라, 내 딸을 때리지 말아라”고 하시며 그저 말로만 울부짖고 계셨다. 이 남자는 “너희들처럼 형편없는 거지들을 내가 어떻게 하든지 그건 내 마음이야. 오히려 너희들을 죽이지 않는걸 고마워 해라”고 소리를 질러대었다. 나는 삽을 들어 그 사람 배 한가운데를 내리치자 꺼꾸러져서 넘어졌다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서는 “게를레! 너의 막 돼먹은 동생이 나를 쳤어. 너희들이 시킨 것 이지?”라며 다시 누나에게 손찌검을 하려다가 내가 다시 삽으로 칠까봐 겁먹은 표정으로 도망쳐 집을 나가 버렸다.
그날 밤새 가족 모두는 겁에 질려 떨었다. 다음날 아침 ‘내가 없는 사이에 그 나쁜놈이 다시 오지나 않을까?’라는 생각에 너무 걱정되었지만 내가 일을 하지 않으면 우리 식구 모두가 또 굶어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시장으로 다시 보냈다.
시장에 갔더니 그날따라 이상하게도 여기 저기서 말다툼을 하고 몸싸움을 벌이며 죽인다 어쩐다라는 험한 소리가 많이 들려 왔다. 부랑자들, 소매치기들, 더러운 바닥에 드러누운 취한 사람들, 아기를 안고 구걸하는 어린 거지들, ‘저리 비켜요 나가요’ 라며 소리치는 짐꾼들. 이 모두가 무섭게 보였다. 나는 거의 미칠 것 같았다. 주변의 모든 것들이 두렵고 삶이 지옥 같고, 인생이란 왜 이렇게 서로 다른지, 우리 가족에게는 왜 이런 고통만 있는지?
사람은 다 일생 동안 가난하게 살면서 몇 푼의 돈을 위해 뼈가 휘어지도록 일을 하다가 결국에는 모두 죽는다. ‘지금 죽는 것과 며칠 뒤에 죽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라는 생각에 ‘자살이나 해 버릴까?’라는 생각이 여러 번 들었다. 그러나 강력한 한가지가 나를 붙잡았다. 그것은 바로 내 어머니의 존재였다. 나 자신만 생각하고 떠나려고 했던 그 때의 이기적인 내 모습을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참으로 가여웠었다.
하루 종일 기어 다니며 힘들게 번 돈을 그날 저녁 시장 부랑자들에게 모두 빼앗긴 그날을 나는 아마도 평생 못 잊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전에 무지하게 슬픈 말을 누나한테 들었기 때문에. 차강사르 때 장만했던 그 많은 사탕, 과일, 샐러드등을 어머니께서는 몇 대째 물려 내려오던 은그릇을 전당포에 맡기시고 사셨다는 것이다. 하나밖에 없는 나를 이 세상에 낳아주신 사랑하는 어머니께 나는 무엇을 요구할 수 있단 말인가? 아들인 나를 위해 죽을 때까지 마음을 졸이며 단지 자식을 위해서 살아 가시는데 나는 어머니를 위해 아무것도 해드린 것이 없다. 그래서 그날 나는 일을 더 해서 그 돈으로 어머니의 은그릇을 찾아드리겠다는 생각으로 늦게까지 일을 했었다. 하지만 그 돈으로 은그릇을 되찾지는 못하고 부랑자들의 술값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나는 지금까지도 그 부랑자들을 미워한다.. 나는 지금까지도 어머니의 은그릇을 되찾지 못했다.
누나가 그 남자친구와 헤어지자 누나의 안색이 밝아 졌다. 하루는 누나가 광고지 하나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것은 ‘나의 눈으로, 나의 느낌’ 라는 독후감 공모 전단지였다. 부상으로 백만 트그륵몽골화폐단위을 준다기에 나는 놀라서 누나에게 “정말이야?”라고 물었을 때 어머니는 “똑똑한 사람만이 이긴단다. 우리 아들도 한번 써 보지 않을래?”라며 말씀하셨을 때 나는 ‘하하하, 나 같은 사람이 뭘… 누나가 쓰는게 훨씬 낫지.” 라고 말했으나 누나는 “신화는 없다’ 라는 책을 구해줄 테니 니가 읽고 그 느낌을 쓰면 된다.”라고 했으나 나는 독후감에 대해 어떠한 생각도 계획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다음날 또 시장에 나가니 들려오는 건 말싸움과 무수한 욕설들…. 나는 정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는 내 자신에 대해 생각하며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나는 한평생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두려운 건 나 자신에게 아무런 목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밤에 집에 돌아오니 누나가 어제 말한 책을 구해 왔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단지 백만 트그륵을 위해 그 책을 읽었다. 8시가 되어 이부자리를 깔고 엎드려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어라, 이 사람도 나처럼 가난하고 끼니를 걱정해 본 사람이구나’ 라고 생각하며 계속 책장을 넘겼다. 12시가 지나고 라디오에서는 정규 방송을 끝내는 애국가가 연주되었지만 나는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잠은 달아나고 오히려 집중력과 흥미가 생겨서 계속 읽었다. 어느새 라디오에서는 아침 6시 국가가 나왔다.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 아니, 벌써 아침이 되었나?”싶어서…
나는 그 아침까지 책의 절반을 읽었는데 ‘이명박 사장’ 이 ‘이라크에서 과연 이익이 날수 있을까?
항상 전쟁중인 나라에서 포탄 하나라도 떨어지면 모든 것이 부숴질 텐 데 어떡하나’라고 염려가 되었었다.. 그 날 아침에 나는 시장에 나가지 않고 아침 밥을 먹자마자 다시 책을 폈고 이틑날 밤이 되어서야 전부 다 읽을 수 있었다.
다 읽은 다음에 나는 어머니에게 책 내용을 전부 다 얘기 해 드리자 어머니도 ‘이명박 사장’의 진실한 팬이 되었으며,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시던 부분은 ‘이명박 사장’이 태국 고속도로를 건설 현장에서 있을 때 첸링(錢玲)이란 중국 아가씨와 만난 부분이었다. 어머니는 이 장면을 들으시고는 나의 어린 아들은 언제 이런 아가씨를 데리고 올거냐며 나를 어린아이처럼 쓰다듬어 주셨다. 다음날부터 나는 시장에서 하던 일을 그만 두고 건설공사장에서 흙을 채로 거르는 일을 했다. 이 일을 일주일하고 나서 건물내부 공사 보조로 일하며 오공본드를 바르고, 벽지 붙이기 등 여러가지 일을 시작했다. 시장에서 일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았고 또한 ‘신화는 없다’ 란 책을 읽고 내 인생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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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상식을 마친 후 어머니와 함께 |
삶은 그 자체가 시험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많은 고생을 겪었다. 하지만 삶의 시험을 당하자 지쳐 쓰러지고 항복하여 자살까지 생각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나보다 더 힘든 시간을 보낸 ‘이명박사장’과 비교해 보면 나는 훨씬 더 부자였었다. 나는 그 동안 게을렀던 나의 모습을 알게 되었고 이와 동시에 내가 굳이 학교를 그만두지 않고 다니면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 것을 깨달았고 더욱 더 잘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 책에서 단 한가지만 배웠다. ‘인생은 시험이다’ 누군가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반드시 성공에 도달하게 된다. 하지만 시험을 통과하는 단 하나의 길은 진실함과 부지런한 노력뿐이다.
지금 난 셀베다리 옆에 있는 공사현장 지붕에 앉아서 이 독후감 마지막 부분을 쓰고 있다. 올란바타르는 지금 6시 30분이 되었다. 아침 해가 참으로 아름답게 솟아 오르고 있다. 나는 전에도 해가 뜨는 것을 여러 번 보았지만 오늘 아침처럼 감동스럽게 솟아 올라오는 것은 처음 본다. 솟아 오르는 해와 같이 이 순간 나의 삶도 새롭게 더 힘차게 솟아 오르고 있다.
처음 나는 상금을 위해 이 책을 읽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상을 받았다는 것을 지금 깨달았다. 왜냐하면 나는 다시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 것은 나에게 가장 큰 상이다. 나는 삶을 느끼고 있고, 난생 처음으로 진정한 삶의 공기를 호흡하고 있다. 이 모두는 굉장하고, 이건 현실이다.
오늘부터 나는 더욱 더 큰 목표를 세울 것이다. 가난으로 어려웠던 경험이 있는 이명박은 한국의 최고 기업의 경영자뿐만 아니라 대통령까지 될 수 있었듯이, 거지 아들이라고 이렇게 될수 없다는 법이 어디 있겠냐? 지금보다 더 잘 살 수 있다는 믿음, 소망, 삶의 가치를 느끼게 해준 ‘신화는 없다’ 이 책의 저자, 번역한 사람, 나에게 이 책을 가져다 준 누나, 모두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리고 싶다. - 끝
번역/한정탁
출처 : 몽골교민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