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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징기즈칸(Genghis Khan, 成吉思汗)과 몽골제국(蒙古帝國) - 34
 작성자 : 관리자 2011.03.09 10:05:34, 조회 2,015 

서요(카라키타이)와 중앙아시아 정복


징기즈칸은 1216년 자신의 숙적이던 메르키트족 톡토아의 동생 호두가 부민들을 모아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몽골본토로 돌아왔다. 1217년 메르키트족에 대한 출정 준비가 완료되자, 그는 수베테이와 토쿠차르에게 메르키트족을 전부 죽여버릴 것을 명령하였고 이에 따라 패배한 메르키트족은 톡토아의 막내아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살해되었다. 이어서 삼림민이던 호리 투마트족에 대한 원정을 감행하였다. 코르치는 자신의 예언대가로 징기즈칸으로부터 투마트족 출신의 미녀 30명을 차지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투마트족 정벌에 나섰으나 거기서 거꾸로 그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이에 징기즈칸은 삼림민의 행태를 잘 알고있던 오이라트족의 수령 쿠두카를 보냈는데 그 역시 포로가 되었다. 이렇게되자 징기즈칸은 보로쿨을 보냈다. 그는 본대와 떨어져 앞서가다가 밤중에 투마트초병의 급습을 받아 살해되고 말았다.


분노에 찬 징기즈칸은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보로쿨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하려하였으나, 주위의 만류로 되르벤족 출신의 한 장군을 뽑아 엄격한 지시를 내리고 영원한 하늘에 대해 기도를 올린 뒤 출정시켰다. 투마트족은 잔치를 벌이던 도중 습격을 받아 패배하였고, 투마트족 수령의 둔영에 잡혀있던 코르치와 쿠두카는 풀려나게 되었다. 코르치는 약속대로 30명의 미녀를 차지하였고, 쿠두카는 투마트족 수령의 부인인 보도쿠이 타르쿤을 차지하였다. 또 100명의 투마트인이 보로쿨의 장례식에 바쳐졌다.


투마트족에 대한 원정시 몽골군에게 원군을 보내기를 거부한 키르기즈족 등 삼림민들의 독립의지를 완전히 꺾어놓기 위해 징기즈칸은 큰아들 주치를 보냈다. 주치는 쿠두카가 오이라트가 있는 곳을 안내하자 시크시트에서 그들을 복속시켰다. 그뒤 주치는 오이라트, 부리야트를 비롯한 다른 삼림부족들을 차례로 정복하였고 키르기즈도 굴복시켰다. 복속한 부족의 수령들은 충성의 표시로 하얀 말과 하얀 매 그리고 검은 담비털을 가져왔고, 주치는 오이라트와 키르기즈의 수령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징기즈칸은 쿠두카의 봉사에 대한 대가로 그의 아들들에게 황녀들을 아내로 주었고 주치에게는 삼림민을 주고 다음과 같이 칭찬하였다. “나의 큰아들이여, 너는 처음으로 집을 나서서 일을 아주 잘 끝냈다. 너는 행운의 삼림민들을 복속시킨 뒤 그들의 말과 사람을 해치지도 않고 무사히 돌아왔다.”


징기즈칸의 적중에 유일한 생존자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나이만족 타양칸의 아들인 쿠출루크였다. 그는 이르티쉬 강가에서의 패전 이후 고향땅인 알타이에서 아버지와 백성들을 잃자 메르키트의 잔당들과 함께 동투르키스탄으로 갔지만 위그르의 이디쿠트인 바르축에게도 몰려 서요(카라키타이)의 군주 구르칸에게로 도망쳤다. 중앙아시아의 투르키스탄은 징기즈칸 침입 이전에 서위그르, 서요, 호라즘 등 세 왕국이 통치하고 있었다. 투르크계 왕조 서위그르는 톈산(천산)산맥 동쪽의 동투르키스탄에, 서요는 탈라스 지방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고, 호라즘은 이란화된 투르크계 왕조로서 서투르키스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서요(카라키타이)는 중국의 거란이 1125년 멸망한 후 거란족의 지도층이 서진, 톈산북로를 통과하여 돌궐(투르크)계 칼라한 왕조를 멸망시키고 그 땅에 왕조를 재건한 것이다.


쿠출루크는 구르칸의 신임을 얻어 그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들였고, 부인의 영향으로 네스토리우스교를 버리고 불교도로 개종하였다. 궁정 내에서 그의 영향력은 점점 커지고 야심도 늘어가자 그는 몽골고원에 흩어져버린 자신의 부족민을 끌어 모으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지금까지 서요에 조공을 바친 호라즘의 술탄 무하마드가 구르, 가즈나, 호라산, 이라크, 그리고 투르키스탄의 일부를 정복하여 자신의 영토를 확장하자 더 이상 조공할 것을 거절하고 쿠출루크와 함께 동서에서 동시에 구르칸을 공격하여 서요의 영토를 분할하기로 비밀리에 합의하였다.

1210년 호라즘이 적대행위를 하자 서요는 거세게 반격하여 사마르칸드를 점령하였다. 그 사이 이리 지역에서는 쿠출루크가 반란을 일으켜 페르가나의 우즈겐에서 국고를 약탈하고 서요의 수도 발라사군으로 진격하였다. 쿠출루크는 이 전투에서 패배하였지만 술탄이 서요의 군대를 크게 이기자, 구르칸에게 봉사하던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투르키스탄의 일부를 장악하였다. 1211년 구르칸은 기습을 당해 쿠출루크의 포로가 되었으나 그는 2년간 장인의 이름으로 통치하였다. 이후 실권을 차지한 쿠출루크는 국경문제로 호라즘과 대결하게 되었다. 쿠출루크는 나이만 잔당을 모아들여 군대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쿠출루크는 중앙아시아에서 티베트산맥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하여 몽골국에 진입할 태세를 갖추었다. 서요의 이러한 소식에 징기즈칸은 군대를 보내기로 하였다. 그는 몽골에게는 위험인물이었으므로 처치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갓 불교도가 된 그는 이슬람 신도들을 증오하여 신자들을 박해하고 공개적으로 예배를 올리지 못하도록 하는 한편, 호탄의 종교지도자인 알라웃딘을 마드라사(종교학교)의 문에 십자가로 처형하였다. 1218년 제베의 지휘하에 2만명의 군대가 쿠출루크가 머물던 카쉬가르 근교에 나타났다. 발라사군과 오늘날의 세미레치에 지역은 아무런 저항없이 몽골군에 투항하였다. 제베는 군대를 가장 엄격한 기율로 통제하였으며 모든 약탈을 금하였다. 제베는 주민들에게 어떠한 종교를 신봉해도 좋고 자기 선조들의 믿음을 따를 수 있다는 징기즈칸의 칙령을 선포하였다. 그동안 종교적인 박해를 받고 무거운 세금 속에서 신음하던 토착민들은 몽골군을 해방군으로 환영하였다.


쿠출루크는 파미르쪽으로 달아났으나 파미르 산속에서 제베의 부하들에게 붙잡혀 사리콜강 부근에서 살해되었다. 제베와 자파르 호자가 쿠출루크의 머리를 매달고 각도시의 성문에 다다르자 주민들은 환영하였다. 이로서 동투르키스탄 전지역, 즉 이리, 이식쿨, 추, 탈라스 지역은 몽골에 합병되었다. 쿠출루크 원정의 결과 몽골인들은 호라즘의 술탄군대와 직접 접촉을 갖게 되었다. 이제 아시아 내륙은 동부의 몽골, 서부의 코라즘 두 제국의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몽골은 금나라의 거란족으로부터 중국지배의 시야와 의욕을 갖게 되었고 서요의 거란족으로부터는 중앙아시아 서쪽지방의 실마리를 얻게 되었다. 몽골인들은 서요를 점거함으로써 몽골리아와 현 이란 북동부 오아시스 지역인 호라즘 간의 교통이 한결 수월해져 페르시아의 정착사회 문물이 유입되게 되었다. 거란인들은 군사, 정치면에서 몽골의 교사로서 새로운 몽골이 되었다. 즉 순몽골족에게 동서 거란이라는 신몽골족이 더해진 몽골군이 호라즘국을 침공하였다.


서요를 지나 그 서쪽에는 무슬림의 땅 다르알 이슬람이 있다. 아랄해로 흐르는 시르다리아강 하류의 비옥한 이 지역을 차지했던 셀주크제국은 1157년 산자르의 사망 이후 쇠락하여 셀주크 술탄이 임명한 지방총독이 독립하였으며 서요에 종속하였다. 이 호라즘샤 가문은 1194년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여, 15년 사이에 페르시아 일대의 대부분을 차지하였고 1210년에는 내분으로 약화된 서요에서 아무다리아강과 시르다리아강 사이의 대오아시스지대를 제압한 후 수도를 우르겐치(히바)에서 사마르칸드로 옮겼다. 이어 1215년에는 골조 술탄들이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산악지대를 점령하였고 이란 방면에서 실권회복 중이던 바그다드 칼리프정권 압바스조를 압박하였다.


이제 이 군사정권은 북으로는 아랄해에서 남으로는 페르시아만까지, 동으로는 파미르고원에서 서로는 자그로스산맥에 이르러, 대부분의 내륙아시아와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이란 땅 전부를 차지함으로서 실크로드의 중심부를 장악하였다. 그러나 호라즘은 이슬람세계의 패권자가 된지 얼마 안되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불안정하였다. 체제안정에 장기간의 휴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제국군대는 키르기스 초원의 구즈나 캉글리의 여러 부족에서 모은 용병들이었으며 정착 이란인과 유목 투르크족 사이에는 끊임없이 분쟁이 있었다.


금나라가 몽골에 짓밟힌 소식은 호라즘샤에게도 전해졌다. 그는 소문을 확인하고 몽골의 군사력에 대한 정보를 탐지하려 징기즈칸에게 사절단을 보냈다. 징기즈칸은 이들을 군영에서 맞아, 자신이 해뜨는 곳의 군주이고 호라즘샤를 해지는 곳의 군주로서 친선을 다짐했지만 알라의 사도인 호라즘샤와 야성의 화신인 징기즈칸의 대결은 불가피하였다. 메르키트 잔당을 추적하던 몽골군과 호라즘 군대 사이에는 당시 소규모 무력충돌이 있었으나 징기즈칸은 이를 피하였다. 그는 총사령관인 주치에게 호라즘과의 마찰을 피하고 전리품도 가능한 한 양보하도록 하였다. 당시 몽골은 새로운 점령지역의 정지작업과 몽골의 행정체제 수립에 바쁘던 때라 분쟁을 바라지 않았다. 주치의 화해제의에 호라즘샤는 “모든 우상숭배자들은 나의 적이다. 징기즈칸이 싸우지 말라 했더라도 알라께서는 너와 싸우라 하였다. 칼이 조각 나고 방패가 산산이 부서질 때까지 싸우자”하였다. 전투는 하루종일 이어졌으나 몽골군은 호라즘군이 두 배나 많아 간단히 처리할 수 없음을 알고 밤을 기다려 철수하였다. 


출처 : 석조건물 문화유산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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