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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징기즈칸(Genghis Khan, 成吉思汗)과 몽골제국(蒙古帝國) - 36
 작성자 : 관리자 2011.03.09 10:08:15, 조회 2,009 

사마르칸드의 함락으로 전쟁의 승패는 결정되었다. 제베와 수베테이에게 쫓긴 호라즘샤는 추격을 피해 이곳 저곳으로 떠돌게 되었다. 타르칸 카툰 역시 마잔다란의 조그만 요새에 피신했으나 4개월간에 걸친 몽골군의 포위로 식수가 떨어져 항복하고 말았다. 호라즘샤의 자식들은 처형되었고 여자들은 분배되었으며, 타르칸 카툰은 몽골에 있는 징기즈칸의 본영으로 이송되어 모욕 속에 살게 되었다.


1220년 가을부터 징기즈칸은 새롭게 편성된 회회포군단과 정복지에서 모집한 보병을 이용하여 호라즘의 다른 도시들을 비교적 쉽게 함락시켰으나 호라즘의 옛 수도 우르겐치는 징기즈칸의 두 아들 주치와 차가타이가 매달려 공격을 했으나 6개월이 지나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징기즈칸은 사태의 진상이 두 형제간의 갈등임을 파악하고 오고타이를 총대장으로 보내 포위작전을 총 지휘하게 하였다. 오고타이는 먼저 형들의 불화를 해소하고 군대의 규율을 회복한 후 1221년 4월 성벽을 타고 넘어 성내로 들어가 함락시켰다. 이것으로 오고타이야 말로 몽골제국을 통치할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는 기회가 되었다.


주치는 모든 시민들에게 성밖으로 나가라고 명령하였다. 공예가와 기술자들은 따로 한 무리를 만들어 정렬시켰다. 그런 후 일반시민들은 몽골군의 각부대 사이에 분배되어 칼, 도끼, 활로 학살되었다. 이 학살을 면한 자는 노예가 된 젊은 여자와 어린이들뿐이었다. 이후 몽골군은 시내를 약탈하고 아무다리아강의 제방을 무너뜨려 시내에 숨어있던 자들을 익사시켰다. 이리하여 우르겐치는 완전히 폐허로 되었다. 결국 몽골은 1년반 사이에 트랜스옥시아나에서 호라즘 세력을 몰아냈다. 이 전쟁에서 영웅적인 행위는 호라즘에 많았으나 조직과 지휘의 통일성 그리고 규율에서 몽골이 크게 우세하였다.


몽골군이 트랜스옥시아나를 정복하는 동안 호라즘샤 무하마드 2세는 발흐로 도망쳤다가 서부 호라산의 니샤푸르로 피신하였다. 계속하여 그는 자기 영토의 반대편 끝인 이라키아잠의 서북부 카즈빈으로 내달렸다. 징기즈칸은 제베와 수베테이가 지휘하는 기병 분견대로 그를 추격하도록 하였다. 제베와 수베테이가 접근하자 발흐는 투항하여 위난을 면하고 통치자를 영접하였다. 한시가 급한 제베는 니샤푸르도 위임통치 정도로 상황을 끝냈으나 수베테이는 투스(마쉬하드), 담간, 삼난을 약탈하였다. 두 장군은 계속 무하마드를 추격하여 이라키아잠으로 들어가 라이를 공격한 후 남자들은 모두 죽이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삼았다. 이어 하마단을 전력 질주하여 통과한 후 카룬에 이르러 무하마드 2세를 잡으려다 놓치자 그들은 분풀이로 잔잔과 카즈빈을 파괴하였다. 무하마드 2세는 카스피해의 작은 섬 아베스쿤으로 도망쳤다. 몽골군은 카스피해 연안에서 배를 만들어 그를 추격할 채비를 갖추었으나 무하마드 2세는 이미 거기서 지쳐 죽었다.


호라즘샤의 죽음으로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호라즘샤 무하마드 2세의 후계자 자랄 알딘 망구베르티는 나사에서 몽골군의 포위망을 뚫고 도망쳐 트랜스옥시아나와 호라산의 재난에서 벗어났다. 그는 호라산을 거쳐 아프가니스탄 산중의 가즈니로 피신하여 새로이 군대를 조직하였다. 자연 전장은 동부이란의 호라산과 아프가니스탄으로 옮겨졌다. 징기즈칸은 1221년 봄 아무다리아강을 건너 호라즘 잔당이 있는 아프가니스탄과 호라산을 정복하기 위해 나섰다. 징기즈칸은 칙령에서 해가 뜨는 곳에서 해가 지는 곳까지 지구상의 모든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신으로부터 부여받았음을 천명하고, “누구라도 항복하는 자는 그의 처자식과 집안 사람들을 살려줄 것이지만, 항복하지 않으면 처자식은 물론 친족 모두를 몰살시킬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사전조사 없이 도망하는 호라즘군을 쫓아 발을 들여놓은 몽골군은 엄정하지 못하여 주민들을 많이 해쳤다. 몽골군은 발흐를 점령하였는데 그곳 주민의 항복에도 그 도시를 파괴하였다. 우르겐치 함락과 같은 시기에 톨루이는 7만의 군사를 이끌고 메르브를 공격하였다. 시내의 수비대는 돌격을 하였으나 포위군에게 쫓겨 되돌아왔다. 성장은 스스로 톨루이의 막사에 찾아가 항복하였으나 같이간 사람들과 함께 결박되었다. 이어서 몽골군은 시내에 들어가 전 주민을 성밖으로 몰아냈다. 주민들은 남과 여 그리고 노인과 어린이로 나뉘어 몽골군의 각부대에 분배되어 울부짖음 속에서 모두 학살되었다. 목숨을 건진자들은 노예로 쓸 약간의 소년소녀에 불과하였다. 메르브의 학살사건은 몽골군의 공격이 시작될 때까지 항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또 얼마 전 징기즈칸의 사위 토구차르가 공격하다 죽은 니샤푸르를 기습하여 개와 고앙이까지 죽였다. 이어서 투스 인근의 아랍 페르시아 문명을 파괴하고 헤라트로 간 톨루이는 자발적으로 항복한 헤라트 주민을 무차별 살해한 후, 탈리간에서 징기즈칸과 다시 합류하였다.


징기즈칸은 탈리간을 파괴한 뒤 힌두쿠시를 넘어 바미얀을 포위하였다. 이 작전에서 차가타이의 아들이자 징기즈칸의 손자인 젊은 무투겐이 전사하자 징기즈칸은 바미얀의 모든 생명을 죽여버림으로서 호라산지역(동부이란)은 회복불능의 폐허가 되었다. 몽골군이 무조건 항복인가 죽음인가의 원칙으로 일관한 것은 자기들이 하늘로부터 세계정복의 사명을 받은 종족으로 이러한 신성한 사명을 달성하기 위하여 전쟁을 한다고 확신하였기 때문이었다. 징기즈칸은 이곳에서 살아남은 주민 20%를 다룰 위그르인 관리 다루가치와 서기들을 남겼다.


파르완에서 자랄 알딘은 징기즈칸의 양자 시기 쿠두쿠가 이끄는 몽골군을 처음으로 격파하였다. 파르완의 승리는 살아남은 동부 이란의 도시들에 용기를 주었다. 징기즈칸은 직접 자랄 알딘을 추격하러 나섰다. 그가 가즈니로 진격하자 자랄 알딘은 다시 도망쳤다. 징기즈칸은 강행군을 하여 인더스강에 이르렀을 때 자랄 알딘은 막 강을 건너려던 참이었다. 그는 추격해 온 몽골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자기 주위의 병사들이 모두 전사하자, 말을 탄 채 인더스강으로 뛰어들어 순식간에 강 저편으로 건너가고 말았다.


몽골병사들이 그를 추적하려 하였으나 징기즈칸은 그들을 제지한 뒤 “아버지라면 마땅히 저런 아들을 두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강 건너편에 도달한 그는 델리 술탄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자랄 알딘의 가족들은 몽골에게 잡혀 사내아이들은 모두 살해되었다. 몽골은 인도 영내로 추격해 들어가지 않았다. 이듬해가 되어서야 잘라이르부의 발라 노얀이 지휘하는 몽골군 분견대가 물탄까지 수색활동을 벌였지만 더위 때문에 바로 철수해 버렸다.


몽골은 금나라보다 수월하게 트랜스옥시아나와 호라산의 요새화된 도시들을 함락시켰다. 몽골은 도시를 함락시키기 위하여 주변 시골과 무방비상태의 도시에서 남자들을 징집하여 성벽으로 몰아붙였다. 그들은 10명 당 한명 꼴로 몽골 깃발을 들려 몽골인으로 위장되었으며 수비대는 이 사람들이 몽골군으로 비쳤다. 이 방법은 몽골의 훈련과 조직에 의해 완벽해지면서 그들의 보편적인 전술이 되었다. 징기즈칸이 사마르칸드 공성전 때 이용한 사람은 부하라에서 데려온 포로들이었으며, 우르겐치 공격에서는 사마르칸드의 포로들이 이용되었고, 톨루이가 메르브를 함락시킬 때는 호라산의 시골주민들을 이용하였다.


몽골은 호라즘을 대부분 정복하였으나 아주 복속시킨 것은 아니었다. 탕구트족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한 징기즈칸은 돌아가기로 결정하였다. 전군에게 선회를 명령하고 천천히 몽골 본토로 퇴각하였다. 그는 처음에 인도를 거쳐 돌아가려 했으나 만년설로 덮여있는 높은 산맥과 울창한 숲 그리고 이곳 도로에 관한 지식부족 등으로 결국 페샤와르를 거쳐 몽골로 귀환하기로 하였다.


출처 : 석조건물 문화유산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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