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인감 때문에 한국 가지 않아도 된다 |
|
작성자 : 관리자 |
2011.04.05 15:14:24, 조회 1,469 |
|
|
인감도장을 서명으로 대체,“본인서명 사실확인제”도입 |
「본인서명사실확인 등에 관한 법률」 제정안 입법예고 |
인감 사용과 관련한 불편이 대폭 줄어들고, 서명을 활용해 본인임을 확인하는 제도도 도입된다.
행정안전부는 금년 중 국회에서 법률이 통과되면 1년 정도의 사전준비 및 안내기간을 거쳐 2012년부터 「본인서명사실확인서」와 「전자본인서명확인서」를 단계적으로 시행할 예정이다.
앞으로 현행 인감제도는 새로운 제도와 병행 운영되며 신청인은 본인의 편의에 따라 「인감증명서」와 「본인서명사실확인서」, 「전자본인서명확인서」 중에서 선택하여 사용할 수 있다. 「본인서명 사실확인제」가 도입되면 전국 어디든 읍•면•동사무소를 직접 찾아가 본인이 서명하면 인감증명서와 동일한 효력을 가지는 확인서(본인서명 사실확인서)를 발급받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또한 본인이 읍•면•동 등을 방문하기 곤란한 경우에는 온라인상에서 직접 「전자본인서명확인서」를 발급할 수 있게 된다.
다만, 현재의 인감제도도 함께 운영되어 서명이 어려운 노인‧장애인 등의 불편은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 본인서명사실확인서 발급 절차 》 ① 민원인이 읍‧면‧동 등 방문 → ② 신분확인 후 전자패드에 서명 → ③ 본인서명사실확인서 발급(읍‧면‧동장 등) → ④ 인감증명서 대신 활용
행정안전부는 현행 인감증명제도를 대체‧병용하는 「본인서명 사실확인제」의 도입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본인서명사실확인 등에 관한 법률 제정안”을 마련하고 3월 31일부터 4월 20일까지(20일간) 입법예고를 통해 국민들의 의견을 수렴한다.
인감증명제도는 1914년 도입 이후 공•사적 거래 관계에 있어 본인의 의사를 확인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어 왔으나, 인감도장의 제작•관리에 불편함이 따르고, 서명에 의한 경제활동의 보편화 추세에 부합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있어 왔다.
또한 불필요하게 인감증명서를 요구하는 사례와 위‧변조 사고 등이 계속 발생하여 인감제도 개선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왔다.
이에 따라, 행안부는 2009년 3월부터 준비해 2009년 7월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와 공동으로 「인감제도개편 방안」을 마련했다.
아울러, 「전자본인서명확인서」가 실시되면 민원인이 직접 읍•면•동을 방문하지 않고 인터넷을 통해 「전자본인서명확인서 발급시스템」에 접속한 뒤 공인인증서와 전자서명을 이용하여 본인이 확인서를 작성•발급할 수 있으며, 수요기관(확인서 제출 요청기관)은 온라인상으로 발급시스템에서 확인서를 확인한 후 민원을 처리하여 서류 없는 행정이 구현된다.
《 전자본인서명확인서 발급 절차 》 ① 사용자의 사전이용 신청(최초 1회, 읍•면•동 등 방문) → ② 민원인이 정부사이트(민원24) 접속 → ③ 공인인증서로 본인 확인 → ④ 확인서 작성 → ⑤ 전자서명 → ⑥ 수요기관이 온라인상으로 확인 후 민원 처리
다만, 본인의 사용의사와 안전성 확보차원에서 확인서 발급시스템의 사전 이용신청 절차를 둘 예정이다 . 최두영 행정안전부 지방행정국장은 “본인서명 사실확인제의 도입은 국민들의 사회‧경제활동의 편의를 더욱 증진하고, 일선행정의 효율성 제고에도 기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출처 : 2011.3.31 몽골교민신문(자료제공 행정자치부)
|
|
|
|
<A href="javascript:self.close();"><IMG border=0 src="http://www.imongoltour.com/nomBoard/data/photo/1217925966/%BE%EE%B8%A3%C7%EB%C6%F8%C6%F7.jpg" width=800></A><BR><BR>출처 : 몽골투어앤비즈
|
<A href="javascript:self.close();"><IMG border=0 src="http://www.imongoltour.com/nomBoard/data/photo/1251097015/%B8%F9%B0%F1%B1%D7%B8%B2_%C0%FC%C5%EB%BA%B9%C0%E5%B0%FA%C7%B3%B0%E6.jpg" width=800></A><BR><BR>출처 : 몽골투어앤비즈
|
<TABLE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100%" align=center>
<TBODY>
<TR>
<TD height=10 colSpan=6></TD></TR>
<TR>
7 Lines more... (total : 12lines) |
주몽골 대한민국 대사관 사증 제도 개선<BR><BR>1. 개요<BR>ㅇ 주몽골 대한민국대사관은 대한민국 입국사증을 신청하는 몽골인들의 편의를 제고하고 쾌적하고 편리한 사증 제도를 시행하기 위하여, 2011.1.10(월)부터 사증신청 대행기관 제도를 시행할 예정임. <BR>ㅇ 아울러 홈페이지 등을 통해 대한민국 사증제도에 대한 안내를 강화하고, 사증신청시 제출하는 부대서류도 간소화할 예정임. <BR><BR>2. 추진 배경<BR>ㅇ 한국을 방문하는 몽골인은 연간 약 4만명 수준이며 한국에 장기 체류중인 몽골인이 3만명을 넘어서는 등 양국간 인적 교류가 확대되고 있음. <BR>- 몽골인들은 대부분 친척 방문, 상용, 관광, 회의ㆍ세미나 참석, 유학 등의 목적으로 한국을 방문하고 있으며, 향후 양국 관계 확대에 따라 교류 규모는 더욱 확대될 것임. <BR>※ 해외 거주 몽골인 현황 : 한국(약 3만명), 미국(약 2만 8천명), 일본(1,671명)<BR><BR>ㅇ 대한민국 입국을 위해서는 주몽골 대사관으로부터 사증을 발급받아야 하는 바, 대사관의 제한된 인력과 시설 등으로 인해 그간 사증을 신청하는 몽골인들의 불편이 초래되어 왔음. <BR><BR>※ 대한민국 사증 관련 몽골인들의 불편 예시<BR>- 한겨울 추운 날씨에 사증을 신청하기 위해 일찍부터 대사관앞에 줄을 섰으나 정해진 접수시간으로 인해 당일 접수하지 못하는 사례 발생<BR>- 대한민국 입국사증을 신청하고 싶으나 정보 부족으로 사증신청을 포기하는 경우도 발생<BR>- 충분한 경제력을 가지고 관광 목적으로 한국을 방문하고자 하였으나, 초청장 등 부대서류 요구가 과다하여 관광을 포기하는 경우 발생 <BR>ㅇ 이러한 불편은 한ㆍ몽 인적 교류 확대 및 양국간 협력 관계 증진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는 판단에 따라 대한민국 대사관은 사증관련 아래 3가지 개선조치를 시행할 것임. <BR><BR>① 사증신청 대행기관 제도 도입<BR>② 사증신청 관련 안내 서비스 강화<BR>③ 사증신청시 제출하는 부대 서류 일부 간소화 <BR><BR>3. 제도 개선 내용<BR>가. 사증신청 대행기관 제도 도입<BR>ㅇ 2011.1.10(월)부터 아래 3개 기관에 대한민국 입국사증을 신청할 수 있으며, 대한민국 대사관은 매주 화요일 10:00-12:00에만 직접 사증접수를 받을 예정임. <BR>- 그러나 사증심사는 여전히 대사관이 종전과 동일하게 시행할 예정이며, 어떤 대행기관을 통해 접수되었는지는 사증발급과는 무관함. <BR>< 대한민국 입국 사증 신청 대행기관 ><BR><BR>Passport Express <BR>International Odgerel KHULAN<BR>DHL Building, Sukhbaatar district, 1 khoroo, Peace Avenue 10-5 <BR><BR>TEL : 7010-0154/0152, FAX : 7011-4458<BR>월-금 09:00-18:00<BR><BR>Mongolian-Korean association for humanitarian relation<BR>Baasanjav LKHAGVAA<BR>Sukhbaatar district, 1 khoroo, Olympic ST8, Mika hotel 2nd floor, #206<BR>Tel/Fax : 7012-4909 <BR>월-금 09:30-13:00 14:00-18:00<BR><BR>Han-Mong law<BR>HAN Hyeong-soo<BR>Bayanzurkh District, 14 khoroo, Bridge Plaza Building 4th floor # 402 <BR><BR>Tel : 463005, 463006, 463007<BR>Fax : 463008<BR>월-금 09:30-13:00 14:00-18:00<BR><BR>ㅇ 주몽골 대사관은 이들 기관이 대사관이 정한 수준을 위반하여 과다하게 수수료를 징수하거나, 사증신청 대행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 내부 규정에 따라 적절한 행정제재를 부과함으로써 편리하고 쾌적한 대한민국 사증신청제도를 정착해 나갈 것임. <BR><BR>나. 사증신청 관련 안내 서비스 강화<BR>ㅇ 대한민국 사증 제도에 대한 안내자료(사증제도 설명 및 신청 절차 안내 자료) 및 체류자격별 구비서류 목록을 사증신청인들이 충분히 알 수 있도록 함으로써 사증신청인들의 편리와 이해를 제고할 예정임. <BR>ㅇ 동 자료는 주몽골 대한민국 대사관 홈페이지의 몽골어 팝업창을 통해 접근가능하며, 사증신청 대행기관에도 동 자료를 비치할 것임. <BR>※ 주몽골 대한민국대사관 홈페이지 : <A class=autoLink href="http://mng.mofat.go.kr/" target=_blank>http://mng.mofat.go.kr</A><BR>다. 사증신청시 제출하는 부대 서류 일부 간소화 <BR>ㅇ 사증신청시 체류목적별로 제출해야 하는 구비서류를 명시하고 일부 불필요한 서류는 간소화함으로써 사증신청자의 편의를 제고할 예정임. <BR>ㅇ 특히 충분한 경제력을 가지고 관광 목적으로 한국을 방문하려는 신청자는 초청장이 없이도 관광 사증신청이 가능할 것이며,<BR>- 친척 초청, 상용 등의 경우 그동안 초청장, 신원보증서, 귀국보증각서 등을 별도로 요구하던 것을 대사관 양식의 초청장만을 제출토록 함으로써 신청인의 편의를 도모할 예정임. <BR><BR>4. 기대 효과<BR>ㅇ 새로운 제도가 시행되면, 편리하고 쾌적한 사증신청이 가능해짐으로써 사증신청인들의 편의가 제고될 것임. <BR>- 사증접수를 위해 더 이상 주몽골대사관 앞에서 줄을 서지 않아도 되며, 사증신청 대행기관을 통해 편리하고 안전한 사증신청이 가능해질 것임.<BR>ㅇ 아울러 그동안 대한민국 사증제도에 대한 정보부족과 불편으로 사증을 신청하지 않았던 잠재적 신청자들이 늘어나게 됨으로써 한ㆍ몽간 인적 교류와 협력이 한단계 높은 수준으로 발전될 것으로 기대함. <BR>- 다만 금번 제도개선이 대한민국 사증 심사 기준의 완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사증 심사는 대한민국 출입국 법령과 절차에 따라 종전과 동일하게 엄격하게 시행할 예정임. <BR>ㅇ 대한민국대사관은 금번 제도 개선 이후에도 대한민국과 몽골을 연결시키는 교량역할을 충실히 담당할 것이며, <BR>- 이를 통하여 양국간 우애와 협력이 제고되고 한국인과 몽골인이 한걸음 가까워 질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함. <BR><BR>주 몽 골 대 한 민 국 대 사 관<BR><BR><BR>출처 : 몽골투어앤비즈
|
<DIV id=article_title>
<DL>
<DT id=blog_title><STRONG>[최현명의 야생 동물 이야기] 몽골 헨티산맥의 설원에서 야생 늑대를 만나다 </STRONG>
<DD id=blog_subtitle>예전엔 떼지어 가축 습격…지금은 먼 발치에서도 사람 피해 </DD></DL></DIV><!-- //ARTICLE-title--><!-- ARTICLE-->
<DIV id=article>
21 Lines more... (total : 26lines) |
해외교포 국내송금・투자 안내<BR><BR><BR>◇ 이 안내문은 외화의 국내송금・투자를 희망하시는 해외교포에 대한 정보제공을 목적으로 작성한 것입니다.<BR><BR>◇ 보다 구체적인 내용이 필요하신 경우에는 현지 대사관 또는 영사관을 통해 기획재정부로 문의 주시기 바랍니다.<BR><BR><BR>Ⅰ. 본인명의 예금계좌로의 송금<BR><BR><BR>□ (외환규정상 제한) 재외동포가 한국내 은행에 외화를 송금하여 예금 또는 금융기관 신탁할 경우 금액상 제한은 전혀 없으며, 향후 원리금 및 이자소득의 해외송금에도 제한 없음<BR><BR>ㅇ 예금계좌는 아래 세가지 종류에서 선택 가능하며, 각 계정의 특성에 따라 향후 예금회수 절차가 상이<BR><BR>① 대외계정<BR><BR>- 외화예금으로서 향후 별도의 증빙없이 예금 및 이자소득 전액을 회수할 수 있음<BR><BR>※ 보통예금/정기예금으로 구분<BR><BR>② 비거주자자유원계정<BR><BR>* 국내에서 동예금을 인출하지 않고 이자소득 획득만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 선택하면 유리한 방식<BR><BR>- 원화예금으로서 향후 별도의 증빙절차 없이 외화로 환전하여 회수할 수 있으나 국내에서 사용할 수 없음<BR><BR>③ 비거주자원화계정<BR><BR>* 향후 한국을 방문하거나 한국내에서의 사업 등을 이유로 한국내에서 동금액을 인출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 선택하면 유리한 방식<BR><BR>- 원화예금으로서 국내에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으나, 회수시 환전 이전에 자금출처를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함<BR><BR>※ 최초 입금시 교부받은 외국환매입증명서를 통해 자금출처를 증빙하면 되며, 동절차는 대리인이 대신 수행할 수 있음<BR><BR><BR>□ (조세부과) 예금에 따른 이자소득에 대한 소득세가 원천징수되며, 동 원천징수 금액은 각국과의 조세조약에 따라 해당국에서 종합소득과세시 외국납부세액으로 공제됨 (이중과세 방지)<BR><BR>※在美교포의 경우 한․미 조세조약에 따라 13.2%(주민세 포함) 부과,<BR>在日교포의 경우 한・일 조세조약에 따라 10%(주민세 포함) 부과, <BR>기타국가는 조세조약 현황에 따라 상이<BR><BR>Ⅱ. 본인명의 계좌로 송금한 뒤 증권투자<BR><BR><BR>□ (외환규정상 제한) 재외동포가 한국내 은행에 외화를 송금하여 주식․채권투자를 하고자 하는 경우 금액제한 없으며, 향후 투자원금 및 투자수익의 해외송금에도 제한이 없음<BR><BR>ㅇ 다만, 절차상 국내 증권회사를 상임대리인으로 지정하고 홈트레이딩 또는 증권사 중개를 통해 투자하여야 하며, 금융감독원에 외국인 투자등록이 필요함<BR><BR>※ 주식투자・채권투자・펀드투자 모두 투자절차는 동일<BR><BR>- 상임대리인을 통하지 않는 경우 본인이 투자전용계정을 직접 개설하여야 하며, 향후 회수시 절차가 복잡할 수 있음<BR><BR>□ (조세부과) 원칙적으로 capital gain에 대하여 비과세되나, 구체적으로는 투자대상에 따라 아래와 같은 차이가 있으며, <BR><BR>ㅇ 우리나라에서 과세된 부분은 조세조약에 따라 해당국에서 종합과세시 외국납부세액으로 공제 (이중과세 방지)<BR><BR><BR>① 주식투자<BR><BR>- capital gain에 대하여는 비과세되나, 배당소득에 대하여는 과세(원천징수)<BR><BR>※ 在美교포 16.5%, 在日교포 15%, 기타국가 조세조약에 따라 상이<BR><BR>② 채권투자<BR><BR>- 이자소득*은 과세되고, capital gain은 비과세<BR><BR><BR>* 채권 명목가액 대비 명목이자율을 통해 계산<BR><BR>※ 在美교포 13.2%, 在日교포 10%, 기타국가 조세조약에 따라 상이<BR><BR>③ 펀드투자<BR><BR>- 펀드투자시 신탁의 이익은 배당소득으로 과세되나, 주식투자로 인한 capital gain에 상당하는 배당소득은 과세제외<BR><BR>※ 在美교포 16.5%, 在日교포 15%, 기타국가 조세조약에 따라 상이<BR><BR><BR>Ⅲ. 타인명의 계좌로 송금<BR><BR><BR>□ (외환규정상 제한) 재외동포가 타인명의 계좌로 송금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자본거래로 분류되어 이에 대한 사전신고 필요<BR><BR>ㅇ 증여 또는 금전대차거래 두 종류가 가능한 바, 각기 상이한 자본거래 신고 등의 외환거래 절차가 적용됨<BR><BR>ㅇ 다만 송금받는 내국인이 지정은행을 정하여 당해 은행을 통하여만 송금받고 송금하는 경우에는 연간 5만불까지 자본거래 신고 및 증빙서류가 면제되어 편리한 송금이 가능<BR><BR>□ (조세부과) 증여인 경우 증여세, 금전대차거래인 경우 국내에서 이자지급시 이자소득세(원천징수)가 부과됨<BR><BR><BR>󰊱 증여거래<BR><BR>ㅇ 내국인에게 증여하는 경우에는 별도의 절차없이 송금가능하며, 증여를 받은 내국인은 증여세 부과대상이 됨<BR><BR>ㅇ 이를 다시 증여형태로 회수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송금 이전에 “증여계약”을 한국은행에 신고해야 송금 가능함<BR><BR>< 증여세 부과개요 ><BR>■공제(10년 합산):배우자 6억원, 직계존비속 3천만원, 친족 5백만원 <BR>■ 세율 : 1억이하 10%, 5억이하 20%, 10억이하 30%, 30억 이하 40%<BR><BR>󰊲 금전대차거래<BR><BR>ㅇ 내국인에게 대출하는 형태로 송금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금전대차계약”을 맺고 내국인이 한국은행에 자본거래 신고한 후 은행에서 송금액 수령<BR><BR>ㅇ 이 경우 내국인이 향후 교포에게 재송금시 별도의 자본거래 절차는 필요없으나, 이자소득세*가 발생<BR><BR>* 在美교포 13.2%, 在日교포 10%, 기타국가 조세조약에 따라 상이<BR><BR>Ⅳ. 거래정보 보고<BR><BR><BR>□ (외환전산망 보고) 1천불 이상의 모든 자금흐름은 통계작성을 목적으로 외환전산망에 보고됨<BR><BR>ㅇ 은행 창구에서 지급․영수시 즉시 외환전산망을 통하여 한국은행 및 기획재정부에 보고<BR><BR>ㅇ 동 보고는 통계작성 및 자금흐름 모니터링을 위한 것으로 조세부과, 혐의거래 파악 등과는 무관함<BR><BR>□ (국세청 보고) 건당 1만불 이상의 자금흐름과 환전실적이 보고됨<BR><BR>ㅇ 증여 등 내국인 소득에 대한 과세자료로 활용하기 위한 목적<BR><BR>□ (금융정보분석원 보고) 원화 2천만원, 외화 1만불 상당 이상의 거래중 혐의거래가 보고됨 (자금세탁 방지목적)<BR><BR>ㅇ 자금세탁 등 불법혐의가 있는 거래에 대하여 금융기관이 금융정보분석원(FIU)에 직접 보고<BR><BR>ㅇ 국제적으로 표준적인 자금세탁방지를 위한 절차이므로, 정상적인 거래시에는 전혀 우려할 필요가 없음<BR><BR>※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등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시행중<BR><BR><BR><BR>출처 : 몽골투어앤비즈
|
The economist 및 World Bank는 2011년 몽골 경제 전망에 대해 아래와 같이 분석하였는 바,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BR><BR>2009 a 2010 b 2011c 2012 c<BR><BR>실질 GDP 증가율 -1.6 8.1 11.9 14.8<BR><BR>총고정투자 증가율 6.9 19.8 31.2 24.1<BR><BR>소비자 물가(인플레이션) 상승율 6.3 11.8 17.1 13.0<BR><BR>대출 이자율 20.8 20.5 24.0 22.7<BR><BR>정부 재정균형 (% of GDP) -5.4 0.0 -1.4 1.7<BR><BR>환율<BR>달러(av) 1,438 1,356 1,168 1,021<BR><BR>달러(end-period) 1,443 1,257 1,098 991<BR><BR>엔(av) 1,534 1,537 1,331 1,177<BR><BR>유로(av) 2,003 1,758 1,390 1,174<BR><BR>a : actual b: estimates c: forecast<BR><BR>1. 재정정책<BR>ㅇ 2011년도 몽골 경제의 호황이 예상되며, 재정도 경기동행적 지출(pro-cyclical spending)의 형태를 보일 것으로 전망 <BR><BR>- 2011년 정부 재정수입은 3조 3046억 투그릭, 재정지출은 4조841억 투그릭으로 정부 재정적자가 7795억 투그릭에 달해 GDP의 9.9% 규모임. <BR><BR>ㅇ 몽골정부는 최근 재정적자를 점진적으로 축소하고, 수출상품 가격의 상승으로부터 발생하는 재정수입을 관리하기 위해 재정안정화법(fiscal stability bill)을 제정<BR><BR>※ 재정안정화법 : 2013년도까지 재정적자를 GDP의 2% 규모로 유지한다는 내용<BR><BR>ㅇ 몽골 정부는 2010년에 상당한 규모의 재정을 지출하였으며, 이는 인플레이션을 증가시키고, 경기 변동성(volatility)의 위험을 높였으나, 정부지출이 재정균형을 위협하지는 않을 전망<BR><BR>- 2011-2012년 몽골의 주요 광물수출 품목의 국제가격 상승이 정부 재정수입을 증가시킬 것이며, 따라서 2011년도 정부재정은 균형 또는 약간의 흑자를 달성할 전망<BR><BR>ㅇ 광업부분의 개발이 현재 예상대로 이루어진다면, 정부 조세수입이 가능한 경제활동이 활발해져, 정부의 재정수입이 늘어날 것임<BR>- 그러나, 만약 광물의 국제가격이 떨어진다면, 몽골정부 대부분의 재정을 광업관련 분야에서 충당하고 있기 때문에 재정위기가 다시 발생할 것임.<BR><BR>2. 통화정책<BR>ㅇ 인플레이션에 대한 압력이 통화정책의 주요 우려 요인이며, 몽골 중앙은행이 향후 6개월내에 이자율을 적어도 2차례 올릴 것으로 전망<BR><BR>- 인플레이션은 세계 식품가격 변동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고 있으며, 이자율을 통해서 물가상승을 억제하려는 효과는 제한적일 것임<BR><BR>ㅇ 수년간 지속되어온 은행대출은 2009년도에 축소되었으며, 2010년도 9개월간 소폭 증가에 그침. 몽골 은행분야가 아직도 취약하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이 급격하게 변화되지는 않을 것임 <BR><BR>ㅇ 2008년도 말에 취해진 정부 당국의 은행예금에 대한 보장은 은행 시스템의 붕괴에 대한 우려를 점차 약화시킬 것이나, 은행들이 우선 자본 충실도를 높이려고 할 것이기 때문에 대출의 증가는 천천히 진행될 전망임. <BR><BR>- 만약 은행들이 해외에서 차입이나, 유동성의 형태로 자금을 끌어들여올 수 있다면 은행 대출은 빠르게 진행될 가능성이 있음<BR><BR>3. 경제성장<BR>ㅇ 작년도 -1.6%성장에 이어 2010년도 8.1%의 경제성장 달성 전망<BR><BR>ㅇ 2010년 신용 증가를 억제시켰던 주요인이었던 은행분야의 문제점들이 2011년에는 다소 완화될 전망 <BR><BR>ㅇ 광업분야의 호황, 건축분야와 서비스 분야에서의 강한 성장과 함께 농업분야의 회복 등으로 인해 2011-2012년간 몽골경제의 호황이 예측됨. 실질 GDP는 향후 2년간 평균 13.4%의 성장을 달성할 것으로 전망.<BR><BR>ㅇ 광업분야의 투자가 GDP 성장을 주도할 것이며, 광업분야의 투자는 광업 관련 설비 및 기계의 수입과 에너지 수입의 증가를 동반할 것임. <BR><BR>- 비록 주요 광산인 Oyu Tolgoi에서 2012년말까지는 광물을 채굴하여 수출할 수는 없지만 현재 여러 광산에서 광물 생산을 확대하고 있어, 수출 또한 급격히 증가할 것으로 전망이며, 광업분야에서 발생하는 세수로 사회복지분야에 대한 지출을 충당할 수 있기 때문에 늘어나는 정부지출이 경제성장을 더욱 촉진시킬 것임 <BR><BR>ㅇ 경제전망에 있어 가장 우려되는 것이 인플레이션인데, 이것은 소비자 신뢰를 저해할 수 있으며, 광산투자를 저해할 수 있음(투자비용이 높아지므로). 다른 한편으로는 몽골 광물의 주요 수출 대상국가인 중국경제가 하락기에 접어든다면 몽골 경제에 상당한 위협으로 작용할 것임 <BR><BR>4. 인플레이션<BR>ㅇ 인플레이션은 수입가격에 의해 결정적인 영향을 받고 있으며 세계금융위기로 인해 2009년도에 수입이 급격하게 감소하였으나, 최근 경기회복으로 인해 수입이 다시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음.<BR><BR>ㅇ 수입 식품 및 원유가격의 재상승이 인플레이션 상승요인으로 작용해 2010년도 10월까지 인플레이션은 11.3%에 달함. 그러나 2011-2012년에는 인플레이션이 완화될 수 있는 긍정적 요인이 있는데, 수입제품의 가격인상은 투그릭의 평가절상에 의해 상쇄될 수 있을 것이며, 2009년-2010에 이르는 가축피해(zud)의 충격이 점차 사라지면서 식품가격의 인플레이션을 완화시킬 것임 <BR><BR>ㅇ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1-12년도의 빠른 경제성장은 모든 분야에서의 고성장을 유발할 것이며 이에 따른 공급의 병목현상으로 인해 거의 모든 소비재 가격의 급격한 상승을 유발할 것으로 전망 <BR><BR>ㅇ 정부가 모든 몽골국민에게 일정 금액을 지급하겠다는 대통령 선거공약 시행과 2010년 10월부터 대폭 인상된 공무원들 급여는 인플레이션을 인상시킬 것이며, 물가의 인상이 임금 인상을 유발하는 순환현상이 나타난다면 인플레이션은 더욱 더 심해질 것임. <BR><BR>ㅇ 상기 사항을 종합해 볼 때 2011-12년간 몽골 평균 인플레이션이 15.1%에 달할 것으로 전망됨.<BR><BR>5. 환율<BR>ㅇ 몽골의 경제성장 전망에 대한 기대감에 따라 2010년 초부터 주재국 투그릭화는 달러대비 계속해서 평가절상중이며 앞으로도 상승이 지속될 전망임. 특히 2011-12년도에는 수출호조와 외국인의 광업분야 투자로 인해 대폭 평가절상될 것으로 전망됨<BR><BR>6. 외부적인 요인<BR>ㅇ 수출은 2008년 하반기의 부진에서 회복되고 있으며, 2009년초에 수출가격의 상승 및 몽골의 주요 무역대상국인 중국으로부터의 강력한 수요로 인해 무역적자 폭이 많이 감소함. 수출은 지속적인 외부 수요(주로 중국)와 구리와 석탄 국제가격의 상승으로 인해 2011-12년도에도 호조를 이룰 것으로 전망됨. <BR><BR>ㅇ 중국은 몽골 수출의 거의 4/5를 차지하고 있으며, 만약 중국의 경제가 하락세로 접어든다면 몽골 수출에 어려움을 겪겠지만, 당분간 그러한 일은 없을 것으로 전망됨<BR><BR>- 수출은 Oyu Tolgoi 광산 프로젝트가 실제 가동이 되면 더욱 촉진될 전망이지만, 2013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가능할 것으로 보임.<BR><BR>ㅇ 수입 수요는 빠르게 증가하고 있으며 국내수요가 상승함에 따라 향후 2년간 지속적으로 회복될 전망이며, Oyu Tolgoi 광산 및 다른 광산분야와 관련된 투자로 인해 수입이 늘어날 전망임. 다소간 무역적자가 예상되지만, 이는 광산분야의 외국인 투자로 인해 상쇄될 수 있을 것임.<BR><BR>7. 대외무역<BR><BR>ㅇ 수출의 증가로 인해 경상수지 적자폭이 감소됨<BR>- 경상수지 적자는 1월-10월까지 2억6천만불로 2008년 7억5천만불에 비해 상당히 양호한 수준을 기록함<BR><BR>ㅇ 2010년도 1월-10월까지의 수출은 22.7억달러로 전년 동기대비 53.1%증가하였으며, 수입은 2010년 1월-10월까지 25.3억불로 전년 동기대비 48.6%증가하였음. 수입증가의 주요원인은 광산분야 개발을 위한 연료와 장비의 도입에 기인함<BR><BR>ㅇ 구리는 현재 몽골의 가장 중요한 수출 품목으로 구리수출 금액은 8월까지 작년대비 83.3% 증가하였으며, 전체 몽골 수출의 28%를 차지하고 있으나 최근 석탄 수출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음. 석탄 수출은 8월까지 작년에 비해 172%가 증가해 전체 수출의 27%를 차지함. (작년의 경우 8월까지 석탄은 전체 수출의 16% 차지) .끝.<BR>(주몽골한국대사관)<BR><BR>출처 : 몽골투어앤비즈<BR>
|
이제 2011년 몽골여행이 시작되었습니다. <BR>본격적인 몽골여행의 출발은 7월(11일-13일) 나담축제를 기준으로 삼지만, 요즘에는 5월부터 몽골여행이 무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2011년 몽골여행과 관련해서 몇 가지 준비 및 안내를 해드립니다.<BR><BR><BR><BR>1. 몽골여행경비<BR><BR>세계적인 물가상승으로 인하여 몽골현지의 물가도 작년에 비하여 많이 올랐습니다. 매년 타지역 보다 비싼 항공료를 지불하면서 진행하는 몽골여행이지만, 올해는 항공료, 호텔비, 렌터카비, 유류대, 식대, 인건비 등이 많이 올랐습니다. 따라서, 가족여행자와 1-7인의 소수여행자들(몽골여행은 성인 8인부터 단체항공권을 적용함)의 부담이 조금더 늘어났습니다. 몽골은 가족여행지로 추천할 수 있지만 여행경비가 많이 든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홉스골 호수와 고비사막 등 유명한 관광지로의 여행은 더욱더 부담스러워지고 있습니다.<BR><BR>결국, 몽골여행 경비를 줄이기 위해서는 단체여행상품에 참여하거나, 중급이하의 호텔 또는 게스트하우스(잘 선택하시면 몽골여행에 어려움이 없음)이용하거나, 여행시기를 성수기(7월초부터 8월중순)를 피하는 방법(5월, 6월, 9월), 최단기 여행기간의 이용(3박 4일-울란바타르와 그 주변지역을 둘러보는 코스이지만 몽골의 자연과 문화를 충분히 접할 수 있음)방법 등을 고려해 볼 수 있습니다. <BR><BR>2. 몽골봉사활동 <BR><BR>학교, 종교단체, 기업 등은 많은 단체가 봉사활동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봉사활동은 주로 나무심기, 빈민가 환경개선, 농촌봉사활동, 의료봉사활동 등 입니다. 2-3년 전에는 한국에서 몽골에 봉사활동을 하러 왔다고 하면 무조건 찬성하고 특별한 문제없이 행사가 마무리 되었습니다(요즘에도 사전 준비를 잘한 대부분의 봉사활동은 정상적으로 진행되고 있음). 하지만 요즘에는 몽골정부차원, 민간단체 등에서 한국에서 지원하는 중고물품의 위생문제, 의약품의 오남용, 봉사활동의 몽골법률상의 적합성 등을 거론하며 다소 엄격한 조사와 검토를 하기 때문에 봉사활동에 있어서 충분한 사전조사와 철저한 준비를 필요로 하게 되었습니다. 몽골은 한국보다는 후진국이지만,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며 몽골인들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부분에 대한 봉사활동이 무엇인지 고민한 후 출발하는 것이 좋습니다.<BR><BR>3. 몽골인의 한국인에 대한 인식<BR><BR>사실 한국인들도 외국인에 대한 거리감이 존재하듯이 몽골인들도 외국인에 대하여 어느 정도 경계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다만, 한국과 몽골의 역사, 1990년 수교이래 많은 인적, 물적 교류로 인한 친근감 등으로 인하여 다른 외국인보다 한국인을 좋게 대우해 주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요즘 몽골에서는 몽골민족주의자들이 적극적으로 몽골인의 주체성, 독립성, 우수성 등을 선전하며 외국인에 대하여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몽골여행시 불필요하게 몽골인들과 접촉하거나, 가이드없이 혼자서 거리를 걷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BR><BR>4. 몽골여행의 특징<BR><BR>대부분의 여행객들은 여행지에서 일상의 모든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오래간만에 떠난 해외여행을 즐기기 위해 많은 여행지에서 다양한 볼거리, 즐길거리를 찾곤 합니다. 하지만 몽골여행은 기본적으로 몽골의 자연경관을 감상하고, 승마체험이 여행의 핵심내용입니다. 그리고, 장거리여행시에는 비슷한 자연경관이 반복되고 즐길거리가 많지 않습니다. 또한, 도로사정 등이 좋지 않아서 피곤한 여정이 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강과 호수에서 수영, 보트타기 등을 즐길 수 있고, 밤하늘의 은하수 감상, 게르의 나무난로에서 장작타는 소리를 들으며 잠자기, 허르헉(몽골양고기찜요리)먹어보기, 바람소리만 들리는 초원에 누워서 맑은 하늘을 감상하면서 심신의 피로를 풀고 재충전의 기회로 삼고 한국으로 돌아오면 아주 훌륭한 몽골여행을 하신 겁니다. <BR><BR>5. 몽골여행시 필요물품<BR><BR>외국여행은 외국의 문화를 접하는 재미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현지의 음식을 맛보고, 공연을 감상하고, 현지인과 몸짓 대화도 시도해 보기도 하지요. 물론 몽골에서도 이러한 경험을 하시겠지만, 약간의 준비를 해서 가신다면 몽골여행은 더 즐거운 여행이 될 수 있습니다. 먼저 여름이기는 하지만 밤에 특히, 게르에서 숙박시 다소 쌀쌀하기 때문에 보온성이 좋은 의류를 준비하시고, 라면, 햇반, 고추장을 준비하시면 식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모자, 썬글라스, 보습제, 물티쉬, 장갑 등은 울란바타르를 벗어나면 필요한 물품 중에 하나입니다. <BR><BR><BR>출처 : (주)몽골투어앤비즈<BR>
|
<P align=center><BR><IMG border=0 hspace=0 src="http://cfs9.blog.daum.net/image/15/blog/2008/03/07/18/37/47d10cebe2bbf&filename=몽골지도.gif"><BR><BR>출처 : 달리는 말의 야후블로그</P>
|
<!-- Contents -->
<DIV class=bd>
<TABLE style="PADDING-BOTTOM: 5px; PADDING-LEFT: 5px; PADDING-RIGHT: 5px; PADDING-TOP: 5px"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100%">
<TBODY>
<TR>
10 Lines more... (total : 15lines) |
몽골 9대 명소를 어제 선정했다. 2년 전에 자연환경관광부, 몽골 관광협회에서 공동으로 '몽골 최고의 9대 명소'를 선정하기로 했었다. 2년 계속된 선발이 특이한 지형으로 구성된 아름다운 유적지,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귀중한 작품이란 2가지 구분으로 국민들의 의견, 자료를 접수했다고 한다. 총 113개의 후보 자료 중 37개는 명소, 76개는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작품이었다고 한다. 몽골 최고의 9개의 명소 및 작품을 아래와 같이 소개하도록 한다. <BR><BR><STRONG>1. 몽골의 고비 /바양자그, 울란제렉, 헝거르걸, 헤르멘 차브/<BR><BR>
<TABLE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TBODY>
<TR>
<TD><IMG src="http://www.kmnews.co.kr/site/_system/include/image.view.php?id=news_mongollia&uid=2149"></TD></TR>
50 Lines more... (total : 55lines) |
<P>태흐라 불리는 몽골의 토종 조랑말</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tyle="FLOAT: none; CLEAR: none; CURSOR: pointer" id=A_11592B514DACF8DE2C727E class=txc-image border=0 hspace=1 vspace=1 src="http://cfile209.uf.daum.net/image/11592B514DACF8DE2C727E" width=583 isset="true" actualwidth="583"></P>
<P></P>출처 : 푸른 하늘에 하얀 햇살<BR style="CLEAR: both">
<SCRIPT type=text/javascript>
<!--
8 Lines more... (total : 13lines) |
<TABLE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100%">
<TBODY>
<TR bgColor=#ffffff>
<TD colSpan=2>
<DIV style="LINE-HEIGHT: 160%; MARGIN: 0px 0px 7px"><B style="FONT-FAMILY: 돋움; LETTER-SPACING: -2px; COLOR: #6d6763; FONT-SIZE: 11pt">인감도장을 서명으로 대체,“본인서명 사실확인제”도입</B></DIV></TD></TR>
4 Lines more... (total : 9lines) |
<DIV class=bbs_contents_inbox><!-- 파이가 존재할경우 파이 뷰어를 인클루드 한다..(전성호) -->
<SCRIPT src="http://pie.daum.net/p/js/pieviewer.js"></SCRIPT>
<DIV id=user_contents class="user_contents tx-content-container scroll" name="user_contents">
<TABLE class=protectTable>
71 Lines more... (total : 76lines) |
<FONT color=#808080 size=2 face=굴림체> 1924년11월 몽골 인민공화국의 완전한 독립을 선포하면서 러시아에 이어 세계에서 2번째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했던 몽골국(외몽고)는 1961년 유엔(UN)가입과, 1964년 중·몽 국경이 확정확정등을 거치면서 많은 정치적 변화를 겪게된다.<IMG border=0 hspace=5 vspace=5 align=right src="http://www.mongolschool.com/mongolia/images/poto-gov.jpg" width=287 height=163><BR><BR> 오랫동안의 사회주의 폐쇄 정책을 실시해 오면서 생긴 극심한 경제적 난제와 세계무대에서 가장 큰지지 기반이었던 러시아의 붕괴는 몽골국(외몽고)의 변화를 더욱 강하게 요구했다.</FONT>
<P style="LINE-HEIGHT: 160%" align=justify><FONT color=#808080 size=2 face=굴림체> 따라서 1988년 12월 제 5 차 공산당 (인민 혁명당) 총회에서 개혁 정책(시네츨를)과 민주화를 추구하기로 결정하였고 90년 7월 29일 최초로 민주 총선을 실시하여 국회(이흐 호랄)를 구성하였다. </FONT></P>
<P style="LINE-HEIGHT: 160%" align=justify><FONT color=gray size=2 face=굴림체> 그 후 서방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개선에 주력했으며, 한국과도 1990년 당시의 태통령인 노태우정권의 북방정책과 어우러져 대사급 수교를 맺게된다. 그러나 지난 2년 동안의 경제 개혁 조치에도 불구하고 생활 여건은 별로 나아진 것이 없으며, 국민들의 경제적 궁핍이 개혁 정책의 효과를 불신케 하자 , 92년 6월 말에 있었던 총선거에서 민족주의의 회복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운 공산당(인민혁명당)이 전체 의석중 92 %를 차지하여 압승을 거두었다. </FONT></P>
<P style="LINE-HEIGHT: 160%" align=justify><FONT color=gray size=2 face=굴림체> 하지만 1993년 6월 국민 직선 대통령 투표에서 야당의 대표로 출마한 오치르바트가 공산당의 후보인 투데브를 누르고 선출되었고, 1996년 6월 30일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 지난 75년 동안 집권하였던 인민 혁명당을 국민들이 거부함으로써, 1924년 근대 국가를 수립 한 이래 처음으로 선거에 의하여 정권이 바뀌는 새로운 정치적 변화를 겪게 되었다. 총선거를 통해 야당 연합이 국회 의석의 3분의 2인 50석을 차지 하여, 국회 의장과 총리, 장, 차관이 새로 교체되며, 사회 전반에 급격 한 세대 교체가 이루어졌다. </FONT></P>
<P style="LINE-HEIGHT: 160%" align=justify><FONT color=gray size=2 face=굴림체> <IMG border=0 hspace=5 vspace=5 align=left src="http://www.mongolschool.com/mongolia/images/대통령.jpg" width=209 height=174>하지만 또다시 1997년 5월 18일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인민 혁명당 후보인 바그반디가 60%의 득표로 현직 오치르바트 대통령을 누르고 당선되므로 몽골의 정치환경은 '균형과 변화'라는 대의전제 앞에 조금씩 새로운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다.<BR><BR>더욱이 몽골은 국제적인 정세변화에 대한 적절한 대응을 위해 한국과의 관계개선에 치중하고 있으며, 김대중대통령의 몽골방문에 이어 계속적인 정치,경제의 유대가 강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BR><BR><BR><BR>출처 : 몽골스쿨닷컴<BR></FONT></P>
|
<FONT size=2 face=굴림체> </FONT><FONT color=gray size=2 face=굴림체> 몽골국(외몽고)는 소련과 중국 사이에 북위 41°35' - 52°09' 위치한 내륙국으로서, 면적이 한반도의 약 7배 (남한의 약16 배)인 약 1,566,500 km2 인데 남북거리가 1,263 km, 동서 거리가 2,405 km에 이른다. 국토 면적상 세계에서 17번째로 넓은 면적을 가지고있다.<IMG border=0 hspace=5 vspace=5 align=right src="http://www.mongolschool.com/mongolia/images/몽골-지도.jpg" width=153 height=95><BR><BR> 몽골국은 수도인 울란바타르가 해발 1,350 미터, 전체 평균해발이 1,580 미터인 고산지대로서 가장 높은 봉우리는 알타이 산맥에 있는 해발 4,374 미터의 후이튼 산이고, 가장 낮은 곳은 해발 552미터의 후흐 호수이다.</FONT>
<P style="LINE-HEIGHT: 160%" align=justify><FONT color=gray size=2 face=굴림체> 평균 고도가 약1,600 M의 고원 국가로 그중 40%가 산악 지대이며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은 형태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국토 중앙과 서쪽에 서울시 면적의 몇 배나 되는 아름다운 호수들이 몇 개가 있고, 그 가운데는 바닷물 성분과 같은 호수도 있다. 동남쪽에는 알타이 산맥이 있고, 서남쪽에는 고비사막이 있는데 국토의 21%에 이른다. <BR>국토의 71 %가 초원(스텝)이며, 8 %가 산림이다.<BR><BR> 몽골국은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로서 날씨의 변화가 심하고 건조하다. 긴 <겨울> (10월 ~ 이듬해 4월 )에 비해 <봄,여름,가을>이 모두 합하여 겨우 5개월밖에 안 된다. </FONT><FONT color=black size=2 face=굴림체><BR><BR> </FONT><FONT color=teal size=2 face=굴림체><B>[강수량]</B>: 연평균 100~250㎜</FONT><FONT color=black size=2 face=굴림체> </FONT><FONT color=gray size=2 face=굴림체>(울란바타르 - 233 mm / 서울의 약 20%) 연평균 강수량이 매우 적으면서도 그 중 65 ~ 78%가 여름에 집중적- (보통 15~20일 )으로 내림기 때문에 늘 건조한 상태이다.- 대신 250여일 정도 맑은하늘을 볼수있다.</FONT>
<P style="LINE-HEIGHT: 160%" align=justify><FONT color=teal size=2 face=굴림체><B> [기온]</B></FONT><FONT color=#002d5a size=2 face=굴림체> </FONT><FONT color=black size=2 face=굴림체>: </FONT><FONT color=gray size=2 face=굴림체>심한 온도 변화로 수도 울란바타르의 경우 겨울에는 <영하 35 ~ 40℃>, 여름에는 <영상 25 ~ 30 ℃>로 연교차가 세계에서 가장 크다.</FONT></P>
<P style="LINE-HEIGHT: 160%" align=justify><FONT color=teal size=2 face=굴림체><B> [풍속]</B></FONT><FONT color=black size=2 face=굴림체> <B>:</B></FONT><FONT color=gray size=2 face=굴림체><B> </B>연간 평균풍속 < 2~3m /sec > <BR><BR><BR>출처 : 몽골스쿨닷컴</FONT></P>
|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class=tit16b><B style="mso-bidi-font-weight: 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킵차크한국 <SPAN lang=EN-US>(Kipchak Khanate)<?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SPAN></SPAN></B></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class=text131><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남러시아에 성립한 몽골왕조<SPAN lang=EN-US>(1243</SPAN></SPAN></SPAN><SPAN class=text131><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바탕">∼</SPAN></SPAN><SPAN class=text131><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lang=EN-US>1502</SPAN></SPAN><SPAN class=text131><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년<SPAN lang=EN-US>)</SPAN>로서 </SPAN></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금장한국<SPAN lang=EN-US>(</SPAN>金帳汗國<SPAN lang=EN-US>)</SPAN>이라고도 한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의 장자 주치<SPAN lang=EN-US>[</SPAN>求赤<SPAN lang=EN-US>, </SPAN>拙赤<SPAN lang=EN-US>]</SPAN>는 이르티시강<SPAN lang=EN-US>(</SPAN>江<SPAN lang=EN-US>) </SPAN>이서<SPAN lang=EN-US>(</SPAN>以西<SPAN lang=EN-US>)</SPAN>의 스텝을 영지로 받았으나<SPAN lang=EN-US>, 주</SPAN>치의 사후 그의 차남 바투는 몽골 서정군의 총수가 되어 러시아 및 동유럽 각지를 석권함과 동시에 남러시아를 확실히 장악하여 킵차크한국의 기초를 구축하였다<SPAN lang=EN-US>. </SPAN>신도<SPAN lang=EN-US>(</SPAN>新都<SPAN lang=EN-US>) </SPAN>사라이가 선 볼가강의 하류지방은 유라시아의 스텝을 경유하는 실크로드와 북방으로부터의 모피로<SPAN lang=EN-US>(</SPAN>毛皮路<SPAN lang=EN-US>)</SPAN>가 교차되는 요충을 점하여 오랫동안 투르크계 하자르족이 활약하는 무대가 되어 있었다<SPAN lang=EN-US>.<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몽골군이 출현했을 때에는 같은 투르크계 킵차크족이 북쪽의 불가르<SPAN lang=EN-US>, </SPAN>서쪽의 슬라브 및 동로마<SPAN lang=EN-US>, </SPAN>동남의 이슬람권과의 사이의 중계무역에 의하여 번영하였다<SPAN lang=EN-US>. </SPAN>또 몽골의 지배자가 급속히 투르크화<SPAN lang=EN-US>, </SPAN>이슬람화한 현상도 같은 사실에서 유래한 것임을 알 수 있다<SPAN lang=EN-US>. </SPAN>이 나라는 그 중계적 입장을 더욱 강화하였으며 제<SPAN lang=EN-US>4</SPAN>대의 베르케칸이 건설한 신<SPAN lang=EN-US>(</SPAN>新<SPAN lang=EN-US>)</SPAN>사라이는 구<SPAN lang=EN-US>(</SPAN>求<SPAN lang=EN-US>)</SPAN>사라이와 함께 국제시장으로서 크게 번창하였다<SPAN lang=EN-US>. </SPAN>그러나 제<SPAN lang=EN-US>9</SPAN>대 우즈베크칸의 최성기 이후<SPAN lang=EN-US> 14</SPAN>세기말부터 티무르군에게 유린되는 등 퇴색이 짙어져서 국토는 카잔<SPAN lang=EN-US>, </SPAN>크림<SPAN lang=EN-US>, </SPAN>아스트라한의<SPAN lang=EN-US> 3</SPAN>한국으로 분열되고 그들이 대립<SPAN lang=EN-US>·</SPAN>항쟁하는 가운데 멸망하였다<SPAN lang=EN-US>. <BR><BR><BR></SPAN></SPAN><SPAN class=tit16b><B style="mso-bidi-font-weight: 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크림한국 <SPAN lang=EN-US>(Khanate of the Crimea)<o:p></o:p></SPAN></SPAN></B></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class=text131><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크림반도<SPAN lang=EN-US>(</SPAN>半島<SPAN lang=EN-US>)</SPAN>를 중심으로 하여 성립된 몽골계 왕조<SPAN lang=EN-US>(1430</SPAN></SPAN></SPAN><SPAN class=text131><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바탕">∼</SPAN></SPAN><SPAN class=text131><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lang=EN-US>1783</SPAN></SPAN><SPAN class=text131><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년<SPAN lang=EN-US>)</SPAN>로서<SPAN lang=EN-US>, </SPAN></SPAN></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바투의 아우 토카티무르의 후예 하지 기레이가 킵차크한국으로부터 독립 건국하였다<SPAN lang=EN-US>. </SPAN>반도 남쪽 바그체 사라이에 수도를 정하여 북방 및 동방과 연락하는 상로<SPAN lang=EN-US>(</SPAN>商路<SPAN lang=EN-US>)</SPAN>인 흑해<SPAN lang=EN-US>(</SPAN>黑海<SPAN lang=EN-US>)</SPAN>로의 출구를 가로막고<SPAN lang=EN-US>, </SPAN>제노바인<SPAN lang=EN-US>(</SPAN>人<SPAN lang=EN-US>)</SPAN>의 식민지 카파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발전했다<SPAN lang=EN-US>. </SPAN>제<SPAN lang=EN-US>2</SPAN>대 멘그리기레이 때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속국이 되었으나 이후<SPAN lang=EN-US> 2</SPAN>세기에 걸쳐 존속하였다<SPAN lang=EN-US>. 1738</SPAN>년 러시아의 예카테리나<SPAN lang=EN-US> 2</SPAN>세에 의해 멸망하였다<SPAN lang=EN-US>. <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class=tit16b><B style="mso-bidi-font-weight: 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카잔한국 <SPAN lang=EN-US>(Kazan Khanate)<o:p></o:p></SPAN></SPAN></B></SPAN></P>
27 Lines more... (total : 32lines) |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class=tit16b><B style="mso-bidi-font-weight: 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사한국<SPAN lang=EN-US> (</SPAN>四汗國)</SPAN></B></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class=tit16b><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징</SPAN></SPAN><SPAN class=text131><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기즈칸이<SPAN lang=EN-US> 4</SPAN>명의 아들에게 분봉<SPAN lang=EN-US>(</SPAN>分封<SPAN lang=EN-US>)</SPAN>한<SPAN lang=EN-US> 4</SPAN>개의 한국으로서 </SPAN></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굴림; mso-font-kerning: 0pt">킵차크한국<SPAN lang=EN-US>[</SPAN>金帳汗國<SPAN lang=EN-US>](1243</SPAN>년<SPAN lang=EN-US>), </SPAN>오고타이한국<SPAN lang=EN-US>(1224</SPAN>년<SPAN lang=EN-US>), </SPAN>일한국<SPAN lang=EN-US>(1258</SPAN>년<SPAN lang=EN-US>), </SPAN>차가타이한국<SPAN lang=EN-US>(1227</SPAN>년<SPAN lang=EN-US>)</SPAN>을 말한다<SPAN lang=EN-US>. </SPAN>몽골제국의 분열조짐은 징기즈칸이 아들에게 땅을 분봉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은 장남 주치<SPAN lang=EN-US>(Juchi, 1185~1127</SPAN>년<SPAN lang=EN-US>), </SPAN>차남 차가타이<SPAN lang=EN-US>(Chagatai), </SPAN>삼남 오고타이<SPAN lang=EN-US>(Ogotai, 1186~1241</SPAN>년<SPAN lang=EN-US>)</SPAN>에게 북외몽골 및 그 서부를 봉지로 주었고<SPAN lang=EN-US>, </SPAN>막내아들 툴루이<SPAN lang=EN-US>(Tolui, 1190~1232</SPAN>년<SPAN lang=EN-US>)</SPAN>는 곁에 두었다<SPAN lang=EN-US>. </SPAN>오고타이<SPAN lang=EN-US>(</SPAN>태종<SPAN lang=EN-US>) </SPAN>때에 이르러 주치의 아들 바투<SPAN lang=EN-US>(Batu, 1205~1255</SPAN>년<SPAN lang=EN-US>)</SPAN>가 남러시아에 킵차크한국을<SPAN lang=EN-US>, </SPAN>차가타이는 중앙아시아에 차가타이한국을 건설하고<SPAN lang=EN-US>, </SPAN>오고타이는 외몽골<SPAN lang=EN-US>·</SPAN>내몽골<SPAN lang=EN-US>, </SPAN>그리고 북중국을 점령하였으나 툴루이는 봉토를 갖지 못하였다<SPAN lang=EN-US>.<?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굴림; mso-font-kerning: 0pt">오고타이칸(태종)의 아들 구유쿠칸(정종, 재위<SPAN lang=EN-US> 1246~1248</SPAN>년<SPAN lang=EN-US>)</SPAN>이 일찍 죽자 제국의 정치<SPAN lang=EN-US>·</SPAN>군사 위원회인 쿠릴타이<SPAN lang=EN-US>(Kurultai)</SPAN>는 툴루이의 아들 몽케칸(<SPAN lang=EN-US>Möngke Khan, 헌종, </SPAN>재위<SPAN lang=EN-US> 1251~1259</SPAN>년<SPAN lang=EN-US>)</SPAN>을 황제로 옹립하였으며<SPAN lang=EN-US>, 몽케칸</SPAN>은 외몽골 지방으로부터 북중국의 지배자가 되었다<SPAN lang=EN-US>. 몽케칸</SPAN>은 새로운 봉지를 찾기 위해 동생 훌라구를 페르시아에 파견하여 일한국을 세우게 하는 한편 자신은 동생 쿠빌라이와 함께 남송<SPAN lang=EN-US>(</SPAN>南宋<SPAN lang=EN-US>)</SPAN>을 정복하기 위해 나섰다<SPAN lang=EN-US>. </SPAN>전쟁 도중에 몽케칸이 죽었으며<SPAN lang=EN-US>, </SPAN>쿠빌라이<SPAN lang=EN-US>(Khublai, 세조, </SPAN>재위<SPAN lang=EN-US> 1260~1294</SPAN>년<SPAN lang=EN-US>)</SPAN>는 베이징(北京)으로 귀환하여 임시 쿠릴타이를 개최하고<SPAN lang=EN-US> 1260</SPAN>년 대칸(大汗)에 즉위하였다<SPAN lang=EN-US>. </SPAN>그러자 이를 반대하던 사한국이 독립을 선언하였다<SPAN lang=EN-US>.<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굴림; mso-font-kerning: 0pt">오고타이한국은 몽골적 색채가 가장 강한 나라였다<SPAN lang=EN-US>. </SPAN>오고타이한국의 지배자 하이두<SPAN lang=EN-US>(Haidu)</SPAN>는 전몽골의 지배권을 얻기 위해<SPAN lang=EN-US> 30</SPAN>여년 중앙의 쿠빌라이칸(세조)에 대항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SPAN lang=EN-US>, </SPAN>그 후 차가타이한국에 합병되었다<SPAN lang=EN-US>. </SPAN>중앙아시아를 지배한 차가타이한국도 칸위(汗位)<SPAN lang=EN-US> </SPAN>계승권을 둘러싼 싸움 끝에 쇠퇴하여<SPAN lang=EN-US>, 14</SPAN>세기 중엽에는 동투르키스탄의 동차가타이한국과 서투르키스탄의 서차가타이한국으로 분열되었다<SPAN lang=EN-US>. </SPAN>티무르제국이 일어나자 서차가타이는 그 영토의 일부가 되고 동차가타이는 그 속국이 되었다<SPAN lang=EN-US>.<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굴림; mso-font-kerning: 0pt">이슬람 영토에 세워진 일한국은 초기에는 <SPAN lang=EN-US><A class=con_link href="http://100.naver.com/100.nhn?docid=25779" target=_blank _cssquery_UID="32"><SPAN style="COLOR: black; TEXT-DECORATION: none; text-underline: none" lang=EN-US><SPAN lang=EN-US><U>그리스도교</U></SPAN></SPAN></A></SPAN>를 옹호하고 이슬람교를 압박하였으나<SPAN lang=EN-US>, </SPAN>뒤에는 이슬람문화를 발전시켜 몽골<SPAN lang=EN-US>·</SPAN>페르시아문화를 꽃피우고<SPAN lang=EN-US>, </SPAN>수학<SPAN lang=EN-US>·</SPAN>지리학<SPAN lang=EN-US>·</SPAN>역사학 분야의 학자를 많이 배출하였다<SPAN lang=EN-US>.<o:p></o:p></SPAN></SPAN></P>
8 Lines more... (total : 13lines) |
<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SPAN lang=EN-US>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TRONG><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몽골의 멸망<BR><BR><SPAN lang=EN-US><?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SPAN></SPAN></STRONG></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몽골제국의 종주국인 원이 망한 이유는 중국에서 몽골인들이 매우 소수였다는 점이다<SPAN lang=EN-US>. </SPAN>중국처럼 인구가 매우 많고 넓은 나라를 이민족이 통치하기란 매우 어렵다<SPAN lang=EN-US>. </SPAN>몽골족은 우수한 군사력을 앞세워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 전체를 지배하였지만 중요한 실책을 저질렀다<SPAN lang=EN-US>. </SPAN>최상층인 몽골인과 그 다음 지배층인 색목인들의 숫자가 매우 적었는데도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족들을 지나치게 차별했다<SPAN lang=EN-US>. </SPAN>한족들은 관직에 나갈 가능성이 매우 희박했고<SPAN lang=EN-US>, </SPAN>경제적으로 큰 부담을 졌으며<SPAN lang=EN-US>, </SPAN>법적 사회적인 차별을 감수해야 했다<SPAN lang=EN-US>. </SPAN>중국은 원제국 황제의 개인 소유물로 취급되었다<SPAN lang=EN-US>. </SPAN>이러한 불만이 쌓인 한족들을 억누를 수 있는 수단은 강력한 군사력밖에 없었는데<SPAN lang=EN-US>, </SPAN>쿠빌라이칸<SPAN lang=EN-US>(</SPAN>세조<SPAN lang=EN-US>) </SPAN>이후로 오랫동안 몽골군들은 전투에 나서지 않아 전투력이 약해졌으며<SPAN lang=EN-US>, </SPAN>그나마 상당수는 다른 직업으로 전환했다<SPAN lang=EN-US>. </SPAN>쿠빌라이칸 이후 문종<SPAN lang=EN-US>(1329~1332</SPAN>년<SPAN lang=EN-US>, </SPAN>투크테무르<SPAN lang=EN-US>)</SPAN>만이 중앙아시아의 차카타이한국으로 원정을 했을 뿐 다른 황제들은 전쟁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SPAN lang=EN-US>. </SPAN>또한 원 왕실 내부에서는 치열한 제위 쟁탈전이 벌어져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원의 멸망에 직접적으로 작용한 홍건적의 난 등이 중국 각지에서 일어났다<SPAN lang=EN-US>. </SPAN>이 난들은 경제적인 문제에 원인이 있었다<SPAN lang=EN-US>. </SPAN>원나라는 쿠빌라이 시대에 처음으로 지폐를 사용하는 등 금융상으로 앞선 면도 있었으나 경제관념의 희박으로 화폐발행을 제대로 못하여 원나라 말기에 급격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SPAN lang=EN-US>. </SPAN>게다가 황하가 범람하는 등 자연 재해까지 겹쳐 백성들의 상태는 매우 핍박했다<SPAN lang=EN-US>. </SPAN>황하의 범람은 전답은 말할 것도 없고 대운하의 수로마저 파괴하여 화북지방의 식량 공급마저 원활하지 못하게 되었다<SPAN lang=EN-US>. </SPAN>마침내<SPAN lang=EN-US> 1351</SPAN>년 한산동을 중심으로 유복통이 이끄는 백련교도들이 홍건적의 난을 일으켰고<SPAN lang=EN-US>, </SPAN>이어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SPAN lang=EN-US>. </SPAN>홍건적은 중국 각지를 휩쓸었고 심지어 고려까지 쳐들어 갔다<SPAN lang=EN-US>. </SPAN>그러나 몽골군은 홍건적을 무찔렀고 홍건적은 끝내 다른 반란군의 무리인 장사성의 군대에게 패하였다<SPAN lang=EN-US>. </SPAN>그리고 역시 다른 반란군인 곽자흥의 부장 주원장이 홍건적의 마지막 수령인 한림아를 죽임으로써 홍건적은 완전히 평정되었다<SPAN lang=EN-US>. </SPAN>홍건적 이외에도 장사성<SPAN lang=EN-US>, </SPAN>곽자흥<SPAN lang=EN-US>, </SPAN>주원장<SPAN lang=EN-US>(</SPAN>곽자흥군에서 독립<SPAN lang=EN-US>), </SPAN>서수휘<SPAN lang=EN-US>, </SPAN>진우량<SPAN lang=EN-US>(1360</SPAN>년 서수휘를 죽임<SPAN lang=EN-US>), </SPAN><?xml:namespace prefix = st1 ns = "urn:schemas:contacts" /><st1:PersonName w:st="on">방국진</st1:PersonName> 등이 반란을 일으켜 원나라는 도저히 이들을 다 진압할 수 없었다<SPAN lang=EN-US>. </SPAN>원나라가 각지의 반란군을 토벌하는 와중에도 여러 반란세력끼리의 싸움은 계속되어 마침내 주원장이 모든 반란세력들을 없앴다<SPAN lang=EN-US>. </SPAN>이제 주원장과 원나라의 싸움만 남게 되었다<SPAN lang=EN-US>. </SPAN>주원장은 장사성의 세력을 제거한 후 북벌군을 편성해 사방에서 원으로 진격했으며<SPAN lang=EN-US>, </SPAN>다음 해인<SPAN lang=EN-US> 1368</SPAN>년 남경에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명<SPAN lang=EN-US>(</SPAN>明<SPAN lang=EN-US>)</SPAN>나라를 세웠다<SPAN lang=EN-US>. </SPAN>명군이 북상하는 와중에도 원나라 조정은 내분에 급급하여 이에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했다<SPAN lang=EN-US>. </SPAN>내분이 마침내 끝났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SPAN lang=EN-US>. </SPAN>그 동안 반란군 진압에 큰 공을 세운 쿠쿠테무르 같은 원나라의 유능한 무장도 더 이상 명군을 대적할 수가 없었다<SPAN lang=EN-US>. </SPAN>마침내 원나라 마지막 황제인 순제는 북쪽으로 몽진에 나섰으나 응창부에서 죽고<SPAN lang=EN-US>, </SPAN>곧바로 명군이 응창부를 습격하여 원 황족들을 포로로 잡았다<SPAN lang=EN-US>. </SPAN>황태자 아이유시리타라만이 약간의 기병들에게 호위되어 북쪽으로 도망치는 데 성공하여 북원을 세웠으나<SPAN lang=EN-US>, </SPAN>중국 왕조로서의 원나라는<SPAN lang=EN-US> 1368</SPAN>년에 멸망했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아이유시리타라는 소종으로서<SPAN lang=EN-US> 1370</SPAN>년부터<SPAN lang=EN-US> 1378</SPAN>년까지 몽골을 다스렸고<SPAN lang=EN-US>, </SPAN>뒤이어 토쿠스테무르가 다스렸으나<SPAN lang=EN-US> 1388</SPAN>년 에스델이라는 자에게 피살됨으로써 북원도 약<SPAN lang=EN-US>20</SPAN>년만에 망하였다<SPAN lang=EN-US>. </SPAN>그 뒤 몽골은 원의 정통 후계인 타타르<SPAN lang=EN-US>(</SPAN>몽고 동부를 지배<SPAN lang=EN-US>)</SPAN>와 오이라트<SPAN lang=EN-US>(</SPAN>몽고 서부를 지배<SPAN lang=EN-US>)</SPAN>로 나뉘게 되었다<SPAN lang=EN-US>. </SPAN>이 두 부족은 번갈아 가며 명나라와 대립했지만 영락제의 <SPAN lang=EN-US>5</SPAN>차례의 막북원정으로 멸망했다<SPAN lang=EN-US>.
3 Lines more... (total : 8lines) |
<SPAN class=tit16b><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3d3d3d; FONT-SIZE: 9pt">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class=tit16b><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3d3d3d; FONT-SIZE: 9pt"><STRONG>몽골제국의 확대와 분열<BR><BR><SPAN lang=EN-US><?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SPAN></STRONG></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FONT color=#000000>칸<SPAN lang=EN-US>(</SPAN>汗<SPAN lang=EN-US>)</SPAN>은 원래 유력한 부족장들의 회의인 쿠릴타이에서 선출되었으나<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의 즉위 후 이 관례는 형식적이 되었고<SPAN lang=EN-US>, 1227</SPAN>년에 그가 죽자 쿠릴타이에서는 징기즈칸이 죽기 전에 이미 지명한 오고타이를 대칸에 즉위하도록 결정하였다<SPAN lang=EN-US>. <BR><BR><o:p></o:p></SPAN></FONT></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FONT color=#000000>오고타이는 금<SPAN lang=EN-US>(</SPAN>金<SPAN lang=EN-US>)</SPAN>나라와 대규모 전쟁을 재개하여 이를 멸망시키고<SPAN lang=EN-US>, 1234</SPAN>년에는 화이허강<SPAN lang=EN-US>(</SPAN>淮河<SPAN lang=EN-US>) </SPAN>이북의 중국을 점령하였다<SPAN lang=EN-US>. </SPAN>한편 주치의 둘째 아들 바투에게 명하여 러시아 및 유럽 각지를<SPAN lang=EN-US> 1235∼1242</SPAN>년에 토벌하게 하였다<SPAN lang=EN-US>. </SPAN>그 결과 남<SPAN lang=EN-US>(</SPAN>南<SPAN lang=EN-US>)</SPAN>러시아는 킵차크한국이 되었다<SPAN lang=EN-US>. </SPAN>태종<SPAN lang=EN-US>(</SPAN>太宗<SPAN lang=EN-US>) </SPAN>오고타이칸은 오르혼강 상류지역에 수도 카라코룸성<SPAN lang=EN-US>(</SPAN>城<SPAN lang=EN-US>)</SPAN>을 구축하고<SPAN lang=EN-US>, </SPAN>이곳을 기점으로 전 영토로 통하는 도로를 건설하고 그 연도<SPAN lang=EN-US>(</SPAN>沿道<SPAN lang=EN-US>)</SPAN>에 역전<SPAN lang=EN-US>(</SPAN>驛傳<SPAN lang=EN-US>)</SPAN>제도를 정비하였다<SPAN lang=EN-US>. </SPAN>이 제도로 광대한 영토 내의 교통이 용이하고 편리하게 소통되었기에 동서문물의 교류가 활발하게 촉진되었다<SPAN lang=EN-US>.<BR><BR><o:p></o:p></SPAN></FONT></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FONT color=#000000>또 오고타이칸은 옐뤼<SPAN lang=EN-US>, </SPAN>취치이 등 정복지역의 학자나 문화인 등을 등용하여 행정기구를 정비하고<SPAN lang=EN-US>, </SPAN>최초의 정액세법<SPAN lang=EN-US>(</SPAN>定額稅法<SPAN lang=EN-US>)</SPAN>을 시행하였다<SPAN lang=EN-US>. </SPAN>오고타이칸의 사후 그의 황후가 섭정을 한 다음<SPAN lang=EN-US>, </SPAN>오고타이의 큰아들 구유크가 제<SPAN lang=EN-US>3</SPAN>대의 대칸위<SPAN lang=EN-US>(</SPAN>位<SPAN lang=EN-US>)</SPAN>에 올랐으나<SPAN lang=EN-US> 3</SPAN>년 만에 죽자<SPAN lang=EN-US>, </SPAN>다시 황후가 섭정이 되었다<SPAN lang=EN-US>. </SPAN>이처럼 대칸위의 공백시대가 계속되었던 것은 오고타이 일가와 바투를 지지하는 툴루이 일가와의 대립이 치열하였기 때문이었다<SPAN lang=EN-US>. </SPAN>오고타이 일가에서는 다음 대의 대칸위에 오고타이의 손자인 쿠주크 시레문을 추대하였고<SPAN lang=EN-US> </SPAN>바투는 툴루이의 큰아들 몽케를 추대하였기에 싸움은 계속되었는데<SPAN lang=EN-US>, </SPAN>결국 툴루이측의 승리로 몽케가 제<SPAN lang=EN-US>4</SPAN>대 대칸이 되었다<SPAN lang=EN-US>. 이</SPAN>후로는 툴루이의 자손이 원조<SPAN lang=EN-US>(</SPAN>元朝<SPAN lang=EN-US>: 1271∼1368</SPAN>년<SPAN lang=EN-US>)</SPAN>에서 대칸위를 독점하게 되었다<SPAN lang=EN-US>. </SPAN>그러나 이와 같은 일족 내부의 대립과 항쟁은 몽골제국을 분열시키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SPAN lang=EN-US>.<BR><BR><o:p></o:p></SPAN></FONT></SPAN></P>
11 Lines more... (total : 16lines)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