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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징기즈칸(Genghis Khan, 成吉思汗)과 몽골제국(蒙古帝國) - 25
 작성자 : 관리자 2011.03.03 10:48:51, 조회 1,915 

이들 전투단위는 평화시에도 유지되었다. 모든 젊은이는 각 단위에 소속되어야 하며 동원령을 피하는 자는 사형에 처해졌다. 모든 남성은 평시에는 수렵의무, 그리고 전시에는 병역의무가 부과되었다. 징기즈칸은 한 집에서 병사 한 명씩만을 차출, 군대를 구성했다. 이들 개개인은 5필의 말을 갖추고 있었다. 전쟁에 임하여 십호에서 이탈자가 하나나 둘 이상이 생기면 전원이 사형되었다. 그리고 만일 10명 전원이 도망친다면 백호를 이루는 나머지 집단 전부가 처형되었다. 마찬가지로 십호의 대원 중 한, 두 명 이상이 대담하게 싸우러 진격하는데 나머지 사람이 그들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들 또한 사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십호 중 한, 두 명이 포로가 되었을 때 그들을 구하지 않을 때도 그들은 사형에 처해졌다. 십호를 떠나는 어떤 대원도 그리고 전장에 부상자들을 버린 어떤 십호 대원들도 사형에 처해졌다. 또 군기가 휘날리는데 전투를 피하는 자들도 사형에 처해졌다.


이제 몽골군은 새로운 형태를 갖추었으며 사소한 부족간의 분쟁과 싸움은 과거의 일이 되었다. 친숙한 부족과 씨족의 이름은 사라지고 여기에 속하였던 사람들은 분산 배치되었다. 징기즈칸 개인의 통합 몽골국이 탄생했으며 그의 야망은 초원을 뛰어넘었다. 새로운 국가는 전쟁을 위해 조직되었다. 십진법으로 나뉘어진 징기즈칸군은 강인한 훈련을 받았으며 장비를 잘 갖추게 되었다. 징기즈칸의 군사재편으로 과거의 부족수령들은 오그라들었고 유목민들의 상시 징병으로 전통적인 생활방식은 파괴되었다. 이러한 전통사회의 와해로 광범위한 계층에서 불만과 저항이 싹트게 되었다.


징기즈칸은 자무카와의 마지막 전쟁을 준비할 때부터 그의 추종자(너케르)로 구성된 친위대(케식텐)를 창설하였었다. 70명의 주간친위대와 80명의 야간친위대였다. 수많은 부족들의 집단적 이기주의를 누르고 중앙으로 집중된 권력을 만들기 위하여 징기즈칸은 지휘관들의 자제를 케식텐에 참여시켜 친위부대의 병력을 크게 늘렸다. 천인대장의 아들이 친위대에 선발되면 열 명의 추종자와 아우 한 명을 같이 오게 했다. 또 백인대장의 아들은 추종자 다섯 명과 한 아우를, 십호장의 아들과 평민의 아들이 들어올 때는 세 명과 아우 한 명을 각각 동반케 하여 만 명을 채웠다. 주간 친위와 야간 친위에 호르친 즉 궁사들이 추가되어 야간 친위대가 800에서 1,000명, 궁사가 400에서 1,000명 그리고 주간 친위대는 8,000명으로 되어 완전한 하나의 투멘이 되었다. 이후 몽골제국은 1330년대까지 이를 유지하였으며, 병력은 경우에 따라 1만2천에서 1만5천으로 증원되었다.


이들은 징기즈칸 일족에게 충성을 맹세함과 동시에 각종 특권이 부여되었다. 케식텐의 구성원들은 정규군의 장들보다 우위에 두어졌다. “외부의 천인대장들이 나의 친위병에게 싸움을 건다면 나는 천인대장들을 벌하겠다.” 주간친위와 궁사는 낮에 징기즈칸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고 해가 지기 직전 야간친위와 교대했다. 야간친위 근무는 엄격했다. 밤에는 야간친위를 제외하는 누구도 오르도 주위를 돌아다닐 수 없었다. 만약 야간친위의 허락 없이 들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목을 베게했다. 급한 보고가 있으면 궁궐의 북쪽에서 야간친위에게 말하도록 했다. 또 야간친위의 숫자는 비밀에 부쳤고 밤에는 야간친위가 전권을 행사토록 하여, 왕실의 안녕을 꾀했다.

이들은 칸의 정책조언을 하였고 쿠릴타이나 칸이 결정한 일을 집행하였다. 결국 각 군의 지휘자들은 두 명의 자녀와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중앙에 볼모로 보낸 셈이었으나 동시에 중앙과 이어지는 통로를 갖게 되었다. 또 이 조직은 군소 토후들의 전횡과 속민들의 소요를 막는 역할도 하였다. 이후 친위대는 수많은 장군과 대제국의 행정을 담당하는 관리들을 배출하여 몽골 정부의 중추가 되었으며 그 역할은 징기즈칸의 아들과 손자에게서도 계속되었다.


가족과 씨족 내부에도 안정과 질서가 뿌리내려야 했다. 군대를 재편한 징기즈칸은 지금까지 진행되던 약탈과 혈투를 없애고 통일국가수립과 새로운 사회질서에 맞추어 군율이 몸에 배도록 하기 위하여 야사라는 징기즈칸 법령을 공표하였다. 야사는 군인뿐만 아니라 일반 유목민에게도 적용되었다. 통일이전 몽골지역에는 지방별로 관습법이 있었는데 야사는 이러한 지방법을 국가안정과 지배체제확립에 초점을 맞추어 새로운 조항을 추가하였다. 민사사건보다는 형사사건에 관한 사항이 월등히 많다든지, 도망간 노예를 잡아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을 의무화한다든지, 유별나게 상하간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점등은 모두 자신을 정점으로 하는 일사불란한 지배체제를 염두에 두고 만든 법규들이다.


야사는 명령 수행을 거부하거나 수행하지 못한 자 혹은 의무를 아주 태만히 하는 자에게는 사형을 하도록 하였다. 스파이 짓과 도적질, 강간행위, 추잡한 행위, 거짓 증언과 도적과 같은 행동에는 사형이 구형되었다. 이로서 살인, 절도, 음모, 간통, 비적, 저주, 장물취득 등은 사형에 처해 졌으며 불복종은 범죄로 다루어졌다. 야사는 또한 사회내 각계층간 상부상조를 강조하고 주변 사람들과 음식물을 나누어 먹으라고 하는 등 복지 문제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특히 야사는 군주가 사신을 파견하여 외지의 고관을 처벌하고자 할 때 그 사신이 최하위직이고 그 처벌이 사형이라 할지라도 그 형의 집행을 달게 받아야 한다고 규정하여 자신의 권위에 대한 일체의 도전을 불허하였다.


그러나 유목민들의 일상 생활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가능한 한 그 지방의 관습법에 맡겨주었고 피정복지에도 그 나라 고유법에 따라 처리하도록 했다. 또한 야사를 지키면 어떤 민족이든 어떤 종교든 보호를 받게 되었고 야사를 어기면 가차없는 피의 응징이 뒤따랐다. 만일 한 부족이나 도시 그리고 국가 전체가 야사 법을 어기면 이들 주민 모두를 처단하였다. 징기즈칸은 젊은 처녀가 금붙이 자루를 가지고 은하에서 중국 해안에 무사히 다닐 수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항구적인 지배체제구축, 가정과 사회의 안정, 종교에 대한 관용이 들어있는 야사는 제국의 안정적 관리를 위한 수단이 되었다.


그는 국가 판사인 자르구치가 위법사항을 심의, 판결하도록 하였다. 야사는 몽골사회에 새로운 질서를 가져다주었다. 야사로서 몽골인들은 아주 순종적이 되었으며 서로 친근하게되어 헐뜯는 일이 없고, 강도와 절도, 그리고 살인은 물론이려니와 말다툼이나 싸움질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또 징기즈칸은 문자로서만 야사를 아득한 후대에까지 변치 않고 전해질 수 있는 수단임을 알고 나이만의 옥새(금인) 관리자였던 위구르인 타타통가에게 이일을 맡겼다. 나이만은 이미 위그르문자에 기초한 문자를 가지고 있어 타타통가는 몽골사람들에게 이 문자를 소개하였으며 징기즈칸에게 성문법과 금인의 중요성을 알려주었다. 이때부터 통치를 위하여 내려진 조칙, 훈령, 지시 등은 문자로 옮겨져 하나의 책에 모아졌고, 이것이 대법령(에케 야사)으로 되어 제국의 구성과 통치의 기초가 되었다.


징기즈칸은 이후, 강력한 군대의 창설에 주력하였다. 보급으로부터 해방과 신속한 기동력이 유목민족의 특징이다. 비록 남루하고 각양각색의 통일되지 않은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철저하고도 확실한 병기점검을 통해 외형상의 조직화된(획일적인) 군대보다 더 실질적이고 내실화된 군대로 움직였다. 몽골군은 전부 기마병이었다. 말들은 같은 기후와 토양에서 자라났으며 똑같은 훈련으로 길들여져 작고 탄탄하였다. 몽골말은 조랑말로 흑마와 백마 두 종류가 있으며 체격에 비해 머리가 크고 눈이 둥글며 목은 굵다. 성질이 온순하고 아무 풀이나 먹고 견딜 만큼 거친 환경에서도 적응력이 강하였다. 힘센 목, 굵직한 다리에, 가죽은 털이 빽빽하였으며 지구력, 꾸준함, 그리고 인내심은 놀랄만하였다.


몽골의 기병들은 둔영지에서 귀마개가 있는 털모자를 쓰고, 털 양말과 장화를 신으며,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외투를 입었다. 전투할 때 그들은 목덜미를 덮는 가죽투구를 쓰고, 검은 옻칠을 한 가죽끈으로 만든 강하고 유연성 있는 흉갑을 입었다. 그들의 공격용 무기는 두개의 활과 두개의 활통, 굽은 군도, 손도끼, 안장에 걸린 쇠로 만든 미늘 창, 적의 기병을 말에서 떨어뜨리기 위한 갈고리가 달린 창, 당기면 죄어드는 올가미가 있는 말 털로 짠 밧줄 등이었다. 


출처 : 석조건물 문화유산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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