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몽골이야기 >자료실
    제목 : 징기즈칸(Genghis Khan, 成吉思汗)과 몽골제국(蒙古帝國) - 28
 작성자 : 관리자 2011.03.08 09:15:27, 조회 1,877 

 

탕구트(서하)와의 전쟁


징기즈칸은 칸이 되기 전부터 거란인(키타이인)이나 여진인 등, 금나라에서 이탈하여 온 사람들을 참모로 삼았다. 특히 거란(키타이)은 언어도 몽골과 비슷한 유목민으로서 웬만하면 중국어, 여진어 등, 여러 나라 말을 할 줄 아는 선배였다. 그들은 테무진과 그의 몽골군의 미래가 불투명할 때부터 테무진을 따랐다. 몽골의 여러 부족들을 통합하고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들을 하나의 군주권 아래로 편입시켜 조직화와 내정정비를 일단 끝낸 1206년에 징기즈칸은 대외전쟁에 나섰다. 그렇지 않으면 주변국가로부터 와해공작이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그의 군대는 피복속 부족민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므로 그들을 무조건 신임할 수도 없었다. 그들이 원래의 거주지에 머물러 있는 한 그만큼 더 위험하였다. 대외전쟁으로 유목민들의 전리품 획득의 기대에 부응하고 아울러 이제 막 통합된 국내를 전시체제로 완전히 통솔, 장악을 계속할 수 있어야 했다. 더구나 그 동안 끊임없는 전쟁과 기후변화로 가축의 수가 격감되어 몽골고원의 목축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받고 있었다.


그는 금나라를 공격하기 앞서 중국의 영하, 감숙, 오르도스, 신강 자치구 일부지역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던 탕구트(서하)를 공격하였다. 탕구트의 북쪽 경계는 고비사막의 남부에서 오아시스 도시인 하미에 이르기까지 몽골족이 살던 지역을 따라 그어져 있었다. 티베트계인 탕구트족은 그들의 지배를 받는 한족과 위그르족 등과 함께 서요를 구성하였으므로, 한족의 정착성향과 위그르의 유목기질이 절충된 사회구조를 유지하였다. 그동안 탕구트는 사막과 초원, 그리고 농경지역을 바탕으로 요, 송, 금 사이에서 독특한 문화를 꽃피우며 발전해 왔고, 경계를 길게 맞댄 막북의 몽골과는 뚜렷한 충돌은 없었다. 그들은 수많은 가축을 쳤고 동서 교역로의 동쪽 끝에 위치하여 국가 재정의 대부분은 교역상의 이득 및 상거래에 부과되는 세에 의존하였다. 탕구트는 중국의 서북방에 있어서 유목민들이 공략하기 힘든 견고한 성곽도시들을 가지고 있었다.


징기즈칸은 내부적으로 제국의 기본틀을 조직화하면서 이 탕구트왕국(서하)을 1205년, 1207년, 1209년의 세 차례에 걸쳐 침입하였다. 쿠릴타이가 열리기 전인 1205년 야율아해 지휘하의 몽골군이 탕구트 영토를 처음으로 공격하여 낙타를 비롯한 많은 가축을 빼앗아 돌아왔다. 두 번째는 1207년 가을로서 그들은 올로하이를 함락하여 많은 말, 낙타, 재물 등을 약탈하고 그곳의 직업적 기술자나 농민들을 잡아 유목지대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들은 탕구트가 군사를 규합하자 1208년 초여름의 더위를 피하여 되돌아왔다. 이 두 번의 공격은 아직 본격적인 정복전쟁이라기보다는 약탈 정보전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당시 서방에는 서요나 호라즘샤가 버티고 있고 남쪽에는 몽골족의 발전을 막아온 동아시아 제1의 강국 금나라가 있었다. 몽골국이 웅비하려면 이들과의 결전을 피할 수 없었고 이를 위해 탕구트를 제편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했다. 또 탕구트의 좋은 말과 낙타, 이름 높은 활과 검, 갑주 역시 탕구트의 기병만큼 몽골에 필요했다. 탕구트를 손에 넣으면 비단길을 통한 동서교역의 이익을 나눌 수 있었고, 무엇보다 중원과 서역으로 진출하는 안전한 통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두 번에 걸쳐 탕구트의 허실을 탐색한 몽골군은 1209년 4월 후방공격을 차단하고 금나라에 대한 원정로를 확보하는데 목적을 두고 탕구트를 침략하였다. 징기즈칸은 중국을 나누고있는 세 나라 가운데 가장 약한 이웃인 탕구트를 공격하여 정착민에 대한 몽골군의 전투력을 시험하였다.


몽골군은 징기즈칸의 지휘하에 약 300km의 고비사막 등, 모두 950km를 통과하여 탕구트 영내로 침입하였다. 몽골군은 처음 올로하이 공격에서 부원수 고령공이 지휘하는 탕구트군에게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탕구트군은 두달 동안 몽골군과 대치함으로서 이 승리를 잘 이용하지 못하였다. 이윽고 몽골에서 지원군이 도착하자 몽골군은 다시 공세에 나서 포위기습전을 벌여 탕구트군의 지휘관인 외명령공을 포로로 잡는 등 큰 승리를 거두었다. 올로하이를 점령한 후 남하한 몽골군은 중흥부 외곽의 최후보루 극이문을 격전 끝에 함락시켰다.


이로써 수도로 통하는 길이 열리게 되어 몽골군은 오르도스 평원으로 진입하였고, 그리고 계속하여 황하유역에 있는 탕구트 수도 중흥부(영하)를 포위 공격하였다. 그러나 탕구트인들은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황하가 가로놓여 있는 데다 중국식 방비가 되어있는 요새를 몽골기병으로는 달리 공격할 방법이 없었다. 몽골군은 넓은 평원지역에서 적을 공격하는 데는 훌륭하였지만 견고한 성채를 공격하는 데는 미숙하였다. 10월에 들어와 징기즈칸은 거대한 둑을 쌓아 황하상류의 물길을 성안으로 향하도록 하였으나 이것은 몽골군에게는 너무나 복잡한 일이어서 공사 중에 둑이 터지면서 몽골군의 진지를 덮치기도 했다.


이러한 시행착오를 통해 여러 형태의 공성법을 익히면서 몽골군은 왕성한 전의와 전투수행으로 수도를 공격하였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탕구트는 금나라에 급히 구원을 요청하였다. 더욱이 중국과 이란을 연결하는 대륙 횡단의 요지를 차지하여 대상교역이 활발한 탕구트는 몽골군의 봉쇄로 교역이 중단됨으로서 이 왕국은 파산지경에 이르렀다. 금나라 대신들은 탕구트가 무너지면 몽골은 필시 금나라를 공격할 것으로 생각하여 탕구트의 요청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으나 금나라 황제는 “적들이 서로 싸우는 것이 우리에게는 훨씬 더 유리하다. 걱정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하고 방관하였다.


탕구트왕 이안전은 별 수 없이 몽골군에게 항복하고 딸 차카란을 바치고 다음과 같이 서약하였다. “우리들은 징기즈칸의 어명을 듣고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지금 칸 자신이 친히 출병하시니 위광에 감복하고 있습니다. 탕구트 사람들은 폐하의 오른손이 되어 원조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몽골족과 달리 정주의 토지를 가지고 성곽이 있는 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날쌘 전투나 빠른 출정은 할 수 없습니다. 그 대신 만일 허락하신다면 많은 낙타와 최상의 직물과 우수한 수렵용 매를 헌상하겠습니다.” 차카라는 이민족의 여인이었으므로 몽골의 여인에 비해 체격 얼굴 생김생김 등이 아름다웠다. 그밖에도 그들은 수많은 흰 낙타를 공물로 바쳤다. 그는 1210년 탕구트의 항복을 받아내고 공물을 약속받는 것으로 전쟁을 일단락 지었다.


탕구트 공격은 몽골에게는 성곽도시를 공격하는 좋은 경험이 되었다. 징기즈칸은 탕구트를 굴복시킴으로서 중국에서 투르키스탄까지의 통행로를 장악하고 금의 영토를 서쪽에서 포위하였다. 한편 탕구트는 1165년 이후 맺어온 금나라와의 화친관계를 단절하고 금나라의 변경을 약탈하기 시작하였다. 이 양국간의 전쟁은 몽골이라는 공동의 적을 두고 다시 연합한 1225년까지 계속되었다.


출처 : 석조건물 문화유산탐방


         -->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Help me
    검색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