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징기즈칸(Genghis Khan, 成吉思汗)과 몽골제국(蒙古帝國) - 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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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관리자 |
2011.03.08 09:26:14, 조회 2,0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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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룰렌 하반에는 1만명의 케식텐 외에도 몽골부족군 12만명이 모였다. 징기즈칸은 있을지도 모를 케레이트족이나 나이만족 등의 반란에 대비하여 콩기라트부의 타후차르에게 2천명의 군대를 주어 고향에 남도록 한 뒤, 남은 전 복속 부족민들을 이끌고 고비사막을 건너 남하하였다. 징기즈칸은 4만명의 우익군을 주치, 차가타이, 오고타이에게 주어 토르강에서 옹구트부 지역으로 남하하게 하고, 자신은 무칼리와 함께 중군을 이끌고 제베, 수베데이, 조치 카사르와 막내아들 톨루이에게 맡긴 좌익과 함께 총 7만명이 케룰렌강에서 동남쪽으로 내려갔다. 춘 3월에는 눈이 녹아 물을 얻을 수 있고 덥지 않아 대사막을 건너는 데에는 적합한 때였다. 1211년 5월 징기즈칸은 고비남쪽 내몽골 초원에 자리잡고 있는 동맹부족 옹구트 지구에 다다르자 행군을 멈추고 병사와 말을 쉬게 하였다.
옹구트족은 금나라와 주종관계에 있었지만 징기즈칸과는 나이만전에서부터 인연을 맺어왔던 부족이었다. 징기즈칸은 1206년의 대대적인 논공행상 때 그들 부족장을 새로운 몽골제국의 고관으로 대접하고 딸 아라가이 베키를 그들 족장의 세자 패요랍한테 시집을 보냈다. 옹구트족은 만리장성의 북방 접근로인 산서성 북부 외곽지대를 지키는 금나라의 파수병 노릇을 하였는데 이러한 정략결혼으로 옹구트는 징기즈칸에게 변경지역을 넘겨주었고 침공로를 열어주었으며 지원군도 보냈다. 또한 난하 상류에 근거를 두고 징기즈칸에게 투신한 거란 호족 야율아해와 야율독화 형제도 금나라 북방을 지키는 거란족 장군과 연락이 닿아 있었다. 당시 금나라의 정규군 맹안모극군은 27만명이었고, 여기에 이민족으로 이뤄진 규군과 지방군인 화모군이 따로 있었다. 그러나 몽골통일의 의미를 잘 모르는 새 황제는 주력을 남송경계에 배치하고 있었다.
난하 상류에 도착한 징기즈칸은 한여름을 그곳에서 보내고 8월에 옹구트 부장 알라쿠시를 앞세워 대청산을 넘는 우익군을 기다렸다가 마침내 행동을 개시하였다. 야율아해가 선도한 우익군은 서경(다퉁, 대동)방면으로 공격하였고, 야율독화가 안내한 좌익군은 내몽골 초원에서 중원으로 들어가는 요충인 야호령으로 진격했다. 금나라는 옹구트가 몽골군에 가담한 줄도 모르고 방책에 의지하여 안심하고 있었다. 뒤늦게 급보를 받은 금의 주력은 야호령 근처 오사보에 방어진지를 구축했지만 제베가 이끈 몽골 좌익군이 우회해 이를 격파했다. 금나라 군사는 전원이 남방에 있는 천혜의 요새 야호령으로 후퇴하였다. 징기즈칸의 대군이 무주를 유린하면서 야호령으로 육박하자 금나라의 최고사령관인 완안승유는 40만의 정예군단을 이끌고 야호령으로 향했다. 그러자 야호령에서 몽골군은 두 군데로 공격을 감행하였다. 공격하기 전 제베는 몽골 돌격대를 모아놓고 몽골군이 금나라에 대한 두려움을 버리고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초전부터 이들을 박살내는데 있다고 하였다. 이들은 징기즈칸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최전방의 결사대로서 죽음만이 그들의 영혼을 쉬게 해주는 고향이었다.
먼저 몽골의 돌격대가 성난 파도처럼 금나라 군에 뛰어들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칼을 휘둘렀다. 금나라군은 돌격하는 이들에게 불덩이 기름을 퍼부었다. 그렇지만 불을 끄려고 땅에 구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타고 있는 말들이 숯이 되어 넘어질 때까지 달리면서 싸우고 베었다. 이들은 말이 쓰러지자 맨 땅위에서 타 죽을 때까지 고통을 나타내거나 울부짖지도 않고 까맣게 타들어 가는 손으로 계속 칼을 휘둘러 살육하였다. 금나라군은 두려움을 느껴 전열을 흩으려 뒤에 도착하는 우군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금나라군은 대혼란을 일으켰고 그리고 이들은 뒤따라오는 몽골 기마병에게 짓밟히거나 죽임을 당하였다. 제베는 이들에게 질서있게 퇴각하여 재정비할 시간을 주지 않고 철저히 궤멸시켰다. 살육전의 이야기를 들은 다른 금나라 군사들도 몽골군에게 놀라움을 갖게 되었다. 이제 그들은 이전의 몽골군이 아니었다.
금나라는 다시 완안승유의 지휘하에 제3의 천혜요새인 선평에 대군을 집결시켜 저항하였으나 오래가지 못해 무너졌다. 완안승유의 정예군과 몽골군은 회하보라는 곳에서 또다시 싸웠지만 금나라 정예군도 전멸되고 말았다. 회하보의 패전은 금나라에게 엄청난 공포를 가져다주었다. 다음의 목표는 몽골고원과 중국을 잇는 거용관으로 금나라는 이곳을 사수하였다. 징기즈칸은 이곳 거용관을 어떻게 통과해야할지 몰라 무슬림인 자파르를 불렀다. 자파르는 이 지방의 지리를 잘 알고있었다. 그는 빽빽한 숲 사이로 외길이 있어 그리로 국경을 통과할 수 있음을 알았으므로, 몽골군은 어둠을 틈타 말의 입에 제갈을 물리고 그의 안내에 따라 경계를 무사히 넘었다. 관문의 견고함을 믿고 안심하던 금나라 방위군은 잠든 사이에 급습을 받아 패하고 말았다.
1211년 9월 몽골군은 금나라의 수도인 중도에서 180리 떨어진 곳까지 육박하였다. 그해 10월 징기즈칸의 세 아들 주치, 차가타이, 오고타이도 몽골 별동대를 이끌고 탕구트와 금나라의 육상통로인 산서성 최북단의 대동(서안), 즉 서경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마치 회오리바람처럼 하북성 북부의 선화(당시 선덕)와 보안지역 등 변경지역을 파괴하였다. 징기즈칸은 초기의 승세를 타고 예상하지 못한 속도로 금나라군을 무찔렀다. 그러나 몽골군은 성이나 성곽에 대한 공략법이 서툴러 산의 능선과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만리장성 돌파가 기병만으로는 쉽지 않음을 알았다. 징기즈칸은 중도의 성벽이 보이는 순간 말머리를 돌렸다. 징기즈칸은 회군하면서 제베에게 요동을 거쳐 고원으로 돌아오라고 하였다. 제베는 이에 따라 금나라의 발상지인 요동의 동경을 함락시키고서 몽골고원으로 돌아왔다.
이번의 1차 공격은 탐색전에 가까웠으나 큰 소득이 있었다. 금나라는 이번 싸움에서 중요한 전투부대와 기동력을 잃었다. 금나라의 북변 방위와 말들의 관리를 맡고 있던 거란족 군단은 야율아해와 독화 형제의 사전교섭으로 전투다운 전투없이 몽골로 돌아서 그대로 몽골의 천호체제에 편입되었다. 또한 내몽골 초원에 널려진 금나라의 군목감(국영가축사육장)을 습격하여 40만 마리의 말을 끌어가 금나라 군사의 기동력에 큰 타격을 입혔다. 금나라의 기동부대인 이들 집단이 대량의 군마와 함께 몽골로 돌아갔기 때문에, 개전 초부터 몽골의 노도와 같은 공세가 그리고 금나라의 지리멸렬한 패퇴가 있었다. 징기즈칸의 천호대는 1206년의 95개에서 1227년에는 129개로 되었는데 불어난 34개 천호대의 대부분은 거란군단이었다
출처 : 석조건물 문화유산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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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font-kerning: 0pt"><SPAN lang=EN-US><?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font-kerning: 0pt">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font-kerning: 0pt"><STRONG>징기즈칸의 사후<BR><BR><SPAN lang=EN-US><o:p></o:p></SPAN></STRONG></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굴림; mso-font-kerning: 0pt">징기즈칸이<SPAN lang=EN-US> 1227</SPAN>년에 사망했을 때<SPAN lang=EN-US>, </SPAN>몽골족의 총병력은 고작<SPAN lang=EN-US> 12</SPAN>만<SPAN lang=EN-US>9</SPAN>천 명에 불과했다<SPAN lang=EN-US>. </SPAN>유목민족의 관점에서는 대병력이었지만 중국의 한족에 비해서는 미미한 숫자였다<SPAN lang=EN-US>. </SPAN>또한 인구 전체로도 몽골족은 약<SPAN lang=EN-US> 1</SPAN>백만에서<SPAN lang=EN-US> 2</SPAN>백만 가량으로 추정되지만 한족은<SPAN lang=EN-US> 2</SPAN>천만 명에 이르렀다<SPAN lang=EN-US>. </SPAN>이러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징기즈칸이 이끄는 몽골병은 군사적으로 압도적인 역량을 과시했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굴림; mso-font-kerning: 0pt">그가 죽었을 때<SPAN lang=EN-US>, </SPAN>분할상속의 부족풍속을 따라 몽골제국은<SPAN lang=EN-US> 4</SPAN>개의 지역으로 나뉘었다<SPAN lang=EN-US>. </SPAN>각 지역은 왕이란 뜻의 <SPAN lang=EN-US>‘</SPAN>칸<SPAN lang=EN-US>(</SPAN>汗<SPAN lang=EN-US>)’</SPAN>을 세우고 독자적인 통치권을 형성했다<SPAN lang=EN-US>. </SPAN>이러한 분열상은 거대한 몽골제국이 백 년을 넘기지 못하고 해체되는 원인이 됐다<SPAN lang=EN-US>. </SPAN>우선 종교적으로 몽골제국의 칸들은 분열상을 보였다<SPAN lang=EN-US>. </SPAN>중국의 황실인 원<SPAN lang=EN-US>(</SPAN>元<SPAN lang=EN-US>)</SPAN>은 불교를 수용했으나 일부 한국들은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굴림; mso-font-kerning: 0pt">징기즈칸에 의해 시작된 중국의 통일과업은 마침내 그의 손자 쿠빌라이<SPAN lang=EN-US>(1215~1294</SPAN>년<SPAN lang=EN-US>)</SPAN>에 의해 완성되었다<SPAN lang=EN-US>. 1279</SPAN>년 중국 남부를 장악했던 한족 왕조인 남송을 무찌르고<SPAN lang=EN-US>, </SPAN>몽골제국이 중국을 재통일하였다<SPAN lang=EN-US>. </SPAN>몽골족은 남송을 격파하기에 앞서<SPAN lang=EN-US> 1271</SPAN>년 원<SPAN lang=EN-US>(</SPAN>元<SPAN lang=EN-US>)</SPAN>을 세웠다<SPAN lang=EN-US>. </SPAN>지금의 북경에 대도<SPAN lang=EN-US>(</SPAN>大都<SPAN lang=EN-US>)</SPAN>라는 명칭의 수도를 세우고 본격적인 중국 지배에 들어갔다<SPAN lang=EN-US>. </SPAN>원은<SPAN lang=EN-US> 1368</SPAN>년 명<SPAN lang=EN-US>(</SPAN>明<SPAN lang=EN-US>)</SPAN>에 의해 붕괴될 때까지 중국을 약<SPAN lang=EN-US> 1</SPAN>세기에 걸쳐 통치했다<SPAN lang=EN-US>. <BR><BR><o:p></o:p></SPAN></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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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STRONG>“내가 사라진 뒤에도 세상에는 위대한 이름이 남게 될 것이다<SPAN lang=EN-US>”<BR><BR><?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SPAN></STRONG></SPAN></P><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굴림; mso-font-kerning: 0pt">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몽골로 돌아온 징기즈칸은<SPAN lang=EN-US> 1225</SPAN>년 겨울부터<SPAN lang=EN-US> 1226</SPAN>년 여름까지 오르콘강의 지류인 툴라강의 막사에서 보냈다<SPAN lang=EN-US>. </SPAN>이제 북경에서 볼가강까지의 세계가 그 앞에서 떨었다<SPAN lang=EN-US>. </SPAN>정복자는 호라즘 문제를 해결하자 탕구트<SPAN lang=EN-US>(</SPAN>서하<SPAN lang=EN-US>)</SPAN>를 응징하기로 하였다<SPAN lang=EN-US>. </SPAN>보통은 대원정의 전후에<SPAN lang=EN-US> 2</SPAN>년간의 준비와 휴식을 주었는데 징기즈칸은<SPAN lang=EN-US> 1226</SPAN>년 곧바로 탕구트 원정에 나섰다<SPAN lang=EN-US>. </SPAN>탕구트는 신하국이었음에도 호라즘 정벌전에 지원군 파견을 거절하였다<SPAN lang=EN-US>. </SPAN>몽골이 금나라 정벌에 군사력을 집중한 사이 탕구트에서는<SPAN lang=EN-US> 1211</SPAN>년 쿠데타가 일어났었고 새로 즉위한 신종은 서정을 위한 몽골의 출병요청을 거절했다<SPAN lang=EN-US>. </SPAN>더욱이 탕구트는<SPAN lang=EN-US> 1225</SPAN>년에는 금과 형제지국의 동맹관계를 회복하여 항몽연합전선을 꾀하였지만 서정에 골몰했던 몽골은 여유가 없었다<SPAN lang=EN-US>. 1223</SPAN>년 무칼리가 죽자 잃었던 땅 일부를 다시 회복한 금나라를 재정복하기 위해서도 몽골은 감숙<SPAN lang=EN-US>, </SPAN>알라산<SPAN lang=EN-US>, </SPAN>오르도스를 직접 지배해야만 했다<SPAN lang=EN-US>. <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lang=EN-US>1225</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년 가을 대장 아타치가 이끌고 출정한 서로군은 신장의 서부에서 위구르 지역을 통과해 하서주랑을 따라 하란산맥 서쪽지역을 공략해 갔고<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 자신은 이듬해<SPAN lang=EN-US> 2</SPAN>월 동로군을 이끌고 남하해 직접 하란산맥 동쪽으로 나와 탕구트의 복판을 향해 쳐들어갔다<SPAN lang=EN-US>. 1226</SPAN>년<SPAN lang=EN-US> 11</SPAN>월 아타치의 서로군과 합세한 징기즈칸의 군대가 서하의 배후도시인 서평부<SPAN lang=EN-US>(</SPAN>영주<SPAN lang=EN-US>)</SPAN>를 포위하자 탕구트는 노장 명외영공에게 병력<SPAN lang=EN-US> 10</SPAN>만 명을 주어 이를 구원하게 했다<SPAN lang=EN-US>. </SPAN>황하의 얼음판 위에서 벌인 양측의 최후 결전은 결국 몽골군의 승리로 끝났다<SPAN lang=EN-US>. </SPAN>탕구트가 농성전을 꾀하자 징기즈칸은 주력을 이끌고 황하를 건너 금의 서경을 선제 공격했다<SPAN lang=EN-US>. </SPAN>금의 탕구트에 대한 원군 파견의 여지를 없앤 것이다<SPAN lang=EN-US>. <SPAN lang=EN-US>1227</SPAN>년초 징기즈칸은 고비사막을 건너던<SPAN lang=EN-US> 중에 </SPAN>진군을 멈추고 야생마를 사냥했다<SPAN lang=EN-US>. </SPAN>갑자기 야생마들이 돌진해오자 징기즈칸의 말이 놀라 뛰어올랐다<SPAN lang=EN-US>. </SPAN>말에서 떨어져 크게 다쳤지만 징기즈칸은 탕구트와 전쟁을 계속했다<SPAN lang=EN-US>. </SPAN></SPAN></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SPAN lang=EN-US>1227</SPAN>년 봄 몽골은 황하 곁에 있는 수도 흥경<SPAN lang=EN-US>(</SPAN>영하<SPAN lang=EN-US>)</SPAN>을 포위하였다<SPAN lang=EN-US>. </SPAN>몽골은 아프가니스탄에서처럼 무자비하였다<SPAN lang=EN-US>. </SPAN>주민들은 헛되게 몽골을 피하여 산으로 동굴로 숨었다<SPAN lang=EN-US>. </SPAN>벌판은 사람의 뼈로 뒤덮였다<SPAN lang=EN-US>. <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그러나 이때 징기즈칸은 낙마로 인한 병이 깊어져 죽음이 가까웠음을 깨달았다<SPAN lang=EN-US>. 1227</SPAN>년 여름 흥경이 포위되어있는 동안 징기즈칸은 오늘날의 평량 서북에 해당하는 용덕의 청수하 지역 육반산의 남록에 하영하면서 오고타이와 톨루이를 불러들였다<SPAN lang=EN-US>. “</SPAN>내 병은 치료될 수 없을 정도로 위중하니<SPAN lang=EN-US>, </SPAN>진실로 너희 가운데 하나가 군주의 지위와 제국의 권력을 수호하고 튼튼한 기초를 다져 권좌를 높여야 한다<SPAN lang=EN-US>. </SPAN>만약 나의 아들 모두가 칸이 되고 군주가 되려고 할 뿐 아무도 상대방에게 복종하지 않으려 한다면<SPAN lang=EN-US>, </SPAN>그것은 마치 여러 개의 머리를 가진 뱀의 이야기와 같이 될 것이다<SPAN lang=EN-US>”</SPAN>라고 한 뒤 오고타이를 후계자로 인정하도록 하였다<SPAN lang=EN-US>. <BR><BR><o:p></o:p></SPAN></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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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B style="mso-bidi-font-weight: 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제베와 수베테이의 페르시아<SPAN lang=EN-US>, </SPAN>러시아 침공</SPAN></B><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BR><BR><SPAN lang=EN-US><?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호라즘샤 무하마드가 죽은 뒤에도 제베와 수베테이는 계속하여 서쪽으로 진군하여 라이를 약탈한 뒤 하마단을 항복시켰다<SPAN lang=EN-US>. </SPAN>그 뒤 잔잔을 파괴하였고<SPAN lang=EN-US>, </SPAN>카즈빈의 주민들은 학살되었다<SPAN lang=EN-US>. </SPAN>계속하여 한겨울에 무간평원을 가로질러 그루지아 기사단과 맞서게 되었다<SPAN lang=EN-US>. </SPAN>수베테이는 이들을 제베가 있는 매복장소로 유인하여 괴멸시키고 그루지아 남부지방으로 짓쳐 들어갔다<SPAN lang=EN-US>. </SPAN>몽골군은 포로들을 앞세우고 성채공격을 하였으며 도시가 함락돼 주민학살이 끝난 뒤에 그곳을 떠나는 체 하다가 회오리바람처럼 되돌아와 도망쳤던 자들의 목을 베었다<SPAN lang=EN-US>. </SPAN>그런 후 몽골군은 아제르바이잔으로 돌아가 샤마카를 약탈하고 이곳을 지나 코카서스산맥을 넘었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코카서스산맥을 넘어 북쪽 스텝으로 내려온 제베와 수베테이는 그 지역민인 알란<SPAN lang=EN-US>, </SPAN>레즈기<SPAN lang=EN-US>, </SPAN>시르카스<SPAN lang=EN-US>, </SPAN>그리고 킵차크 투르크인들과 충돌하였다<SPAN lang=EN-US>. </SPAN>몽골군은 먼저 투르크<SPAN lang=EN-US>-</SPAN>몽골의 형제애에 호소하고 약탈물의 일부를 주어 킵차크인들이 배신하도록 한 후 다른 지역민들을 하나씩 차례로 격파하고<SPAN lang=EN-US>, </SPAN>마지막에는 킵차크인까지 격파하여 약탈물을 되찾아 갔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패배한 킵차크인들은 루시 공작들에게 호소하였다<SPAN lang=EN-US>. </SPAN>그리하여 여러 제후들이 이끄는<SPAN lang=EN-US> 8</SPAN>만의 러시아군이 드네프르강을 따라 내려왔다<SPAN lang=EN-US>. </SPAN>몽골군은 러시아군이 지쳐 널리 분산될 때까지 후퇴하다가 아조브해 북방의 칼카 강가에서 갈리치의 왕자와 킵차크인들을 격파하였다<SPAN lang=EN-US>. </SPAN>이어서 몽골군은 크리미아의 수닥과 솔다이아에 있던 제노아인들의 창고들을 털었으며 흑해변에서 겨울을 지낸 후 볼가강을 건너 카마강가의 불가르와 우랄산맥의 캉그리를 격파한 후 원정을 끝내고 시르다리아강의 북부 초원에서 징기즈칸의 본군과 합류하였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징기즈칸은 개선한 후<SPAN lang=EN-US>, </SPAN>유목지역을 여러 아들과 동생들에게 나누어주었다<SPAN lang=EN-US>. </SPAN>즉<SPAN lang=EN-US>, </SPAN>몽골 본토는 징기즈칸 자신의 직할지로 하여<SPAN lang=EN-US>, </SPAN>넷째 아들인 톨루이에게 잇도록하고<SPAN lang=EN-US>, </SPAN>큰아들 주치에게는 카스피해와 아랄해 북방의 영토<SPAN lang=EN-US>, </SPAN>즉 남 러시아의 킵차크 초원지대를 주었으며<SPAN lang=EN-US>, </SPAN>둘째 아들인 차가타이에게는 카라키타이의 옛 땅인 중앙 아시아를 나누어주었다<SPAN lang=EN-US>. </SPAN>또 셋째 아들인 오고타이에게는 일리강 유역을 중심으로 외몽고 서부에서 천산산맥에 걸친 옛 나이만땅을 나누어주었다<SPAN lang=EN-US>. </SPAN>그리고 동부 몽골고원과 만주지방은 동생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며 남방의 농경지대는 황금씨족의 공유재산으로 하고 거기에 다루가치<SPAN lang=EN-US>(</SPAN>총독<SPAN lang=EN-US>)</SPAN>와 주둔군을 배치하여 치안유지와 징세를 맡게 하였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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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사마르칸드의 함락으로 전쟁의 승패는 결정되었다<SPAN lang=EN-US>. </SPAN>제베와 수베테이에게 쫓긴 호라즘샤는 추격을 피해 이곳 저곳으로 떠돌게 되었다<SPAN lang=EN-US>. </SPAN>타르칸 카툰 역시 마잔다란의 조그만 요새에 피신했으나<SPAN lang=EN-US> 4</SPAN>개월간에 걸친 몽골군의 포위로 식수가 떨어져 항복하고 말았다<SPAN lang=EN-US>. </SPAN>호라즘샤의 자식들은 처형되었고 여자들은 분배되었으며<SPAN lang=EN-US>, </SPAN>타르칸 카툰은 몽골에 있는 징기즈칸의 본영으로 이송되어 모욕 속에 살게 되었다<SPAN lang=EN-US>. <BR><BR><?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lang=EN-US>1220</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년 가을부터 징기즈칸은 새롭게 편성된 회회포군단과 정복지에서 모집한 보병을 이용하여 호라즘의 다른 도시들을 비교적 쉽게 함락시켰으나 호라즘의 옛 수도 우르겐치는 징기즈칸의 두 아들 주치와 차가타이가 매달려 공격을 했으나<SPAN lang=EN-US> 6</SPAN>개월이 지나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은 사태의 진상이 두 형제간의 갈등임을 파악하고 오고타이를 총대장으로 보내 포위작전을 총 지휘하게 하였다<SPAN lang=EN-US>. </SPAN>오고타이는 먼저 형들의 불화를 해소하고 군대의 규율을 회복한 후<SPAN lang=EN-US> 1221</SPAN>년<SPAN lang=EN-US> 4</SPAN>월 성벽을 타고 넘어 성내로 들어가 함락시켰다<SPAN lang=EN-US>. </SPAN>이것으로 오고타이야 말로 몽골제국을 통치할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는 기회가 되었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주치는 모든 시민들에게 성밖으로 나가라고 명령하였다<SPAN lang=EN-US>. </SPAN>공예가와 기술자들은 따로 한 무리를 만들어 정렬시켰다<SPAN lang=EN-US>. </SPAN>그런 후 일반시민들은 몽골군의 각부대 사이에 분배되어 칼<SPAN lang=EN-US>, </SPAN>도끼<SPAN lang=EN-US>, </SPAN>활로 학살되었다<SPAN lang=EN-US>. </SPAN>이 학살을 면한 자는 노예가 된 젊은 여자와 어린이들뿐이었다<SPAN lang=EN-US>. </SPAN>이후 몽골군은 시내를 약탈하고 아무다리아강의 제방을 무너뜨려 시내에 숨어있던 자들을 익사시켰다<SPAN lang=EN-US>. </SPAN>이리하여 우르겐치는 완전히 폐허로 되었다<SPAN lang=EN-US>. </SPAN>결국 몽골은<SPAN lang=EN-US> 1</SPAN>년반 사이에 트랜스옥시아나에서 호라즘 세력을 몰아냈다<SPAN lang=EN-US>. </SPAN>이 전쟁에서 영웅적인 행위는 호라즘에 많았으나 조직과 지휘의 통일성 그리고 규율에서 몽골이 크게 우세하였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몽골군이 트랜스옥시아나를 정복하는 동안 호라즘샤 무하마드 2세는 발흐로 도망쳤다가 서부 호라산의 니샤푸르로 피신하였다<SPAN lang=EN-US>. </SPAN>계속하여 그는 자기 영토의 반대편 끝인 이라키아잠의 서북부 카즈빈으로 내달렸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은 제베와 수베테이가 지휘하는 기병 분견대로 그를 추격하도록 하였다<SPAN lang=EN-US>. </SPAN>제베와 수베테이가 접근하자 발흐는 투항하여 위난을 면하고 통치자를 영접하였다<SPAN lang=EN-US>. </SPAN>한시가 급한 제베는 니샤푸르도 위임통치 정도로 상황을 끝냈으나 수베테이는 투스<SPAN lang=EN-US>(</SPAN>마쉬하드<SPAN lang=EN-US>), </SPAN>담간<SPAN lang=EN-US>, </SPAN>삼난을 약탈하였다<SPAN lang=EN-US>. </SPAN>두 장군은 계속 무하마드를 추격하여 이라키아잠으로 들어가 라이를 공격한 후 남자들은 모두 죽이고<SPAN lang=EN-US>, </SPAN>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삼았다<SPAN lang=EN-US>. </SPAN>이어 하마단을 전력 질주하여 통과한 후 카룬에 이르러 무하마드 2세를 잡으려다 놓치자 그들은 분풀이로 잔잔과 카즈빈을 파괴하였다<SPAN lang=EN-US>. </SPAN>무하마드 2세는 카스피해의 작은 섬 아베스쿤으로 도망쳤다<SPAN lang=EN-US>. </SPAN>몽골군은 카스피해 연안에서 배를 만들어 그를 추격할 채비를 갖추었으나 무하마드 2세는 이미 거기서 지쳐 죽었다<SPAN lang=EN-US>. <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호라즘샤의 죽음으로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SPAN lang=EN-US>. </SPAN>호라즘샤 무하마드 2세의 후계자 자랄 알딘 망구베르티는 나사에서 몽골군의 포위망을 뚫고 도망쳐 트랜스옥시아나와 호라산의 재난에서 벗어났다<SPAN lang=EN-US>. </SPAN>그는 호라산을 거쳐 아프가니스탄 산중의 가즈니로 피신하여 새로이 군대를 조직하였다<SPAN lang=EN-US>. </SPAN>자연 전장은 동부이란의 호라산과 아프가니스탄으로 옮겨졌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은<SPAN lang=EN-US> 1221</SPAN>년 봄 아무다리아강을 건너 호라즘 잔당이 있는 아프가니스탄과 호라산을 정복하기 위해 나섰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은 칙령에서 해가 뜨는 곳에서 해가 지는 곳까지 지구상의 모든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신으로부터 부여받았음을 천명하고<SPAN lang=EN-US>, “</SPAN>누구라도 항복하는 자는 그의 처자식과 집안 사람들을 살려줄 것이지만<SPAN lang=EN-US>, </SPAN>항복하지 않으면 처자식은 물론 친족 모두를 몰살시킬 것<SPAN lang=EN-US>”</SPAN>이라 하였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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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TRONG>호라즘을 정복하고 제국을 건설하다<BR><BR><SPAN lang=EN-US><?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SPAN></STRONG></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금의 수도를 함락한 후<SPAN lang=EN-US> 1216</SPAN>년 몽골로 돌아온 징기즈칸은 그가 없는 틈을 타서 그가 복속시켰던 부족들<SPAN lang=EN-US>, </SPAN>특히 나이만족의 반란이 점차 조직적으로 발전하는 것을 느꼈다<SPAN lang=EN-US>. </SPAN>이들 반란세력은 호라즘의 간접지원을 받고 있었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은<SPAN lang=EN-US> 1216</SPAN>년부터<SPAN lang=EN-US> 2</SPAN>년간 전 몽골군에게 휴식을 주어 다음의 원정준비를 시켰다<SPAN lang=EN-US>. </SPAN>서방으로는 첩보<SPAN lang=EN-US>, </SPAN>계략을 목적으로 하는 통상단을 보냈다<SPAN lang=EN-US>. </SPAN>이즈음 중앙아시아의 여러 지역을 왕래하는 대상들은 여행을 통해 지리적인 특징<SPAN lang=EN-US>, </SPAN>군대의 배치<SPAN lang=EN-US>, </SPAN>주민들의 분위기<SPAN lang=EN-US>, </SPAN>궁정내의 당파 등에 대해 매우 유용한 정보를 서로 주고 받고 있었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lang=EN-US>1218</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년 호라즘의 교역 사절단이 징기즈칸을 방문하자 그는 답례로 낙타에 귀중품을 실어<SPAN lang=EN-US> 450</SPAN>명의 사절단을 보냈다<SPAN lang=EN-US>. </SPAN>이들은 호라즘 땅 오트랄에 도착하면서부터 징기즈칸의 권위와 종교적인 관용<SPAN lang=EN-US>, </SPAN>몽골군의 강인함<SPAN lang=EN-US>, </SPAN>그리고 반항하는 자들이 받는 비참한 처벌에 대해 주민들에게 선전하고 다니자 국경 수비대장 이날축은 이들을 스파이 집단으로 몰아 모두 죽였다<SPAN lang=EN-US>. </SPAN>이 사실을 전해들은 징기즈칸은 몽골의 특명사절을 보내 이를 따졌다<SPAN lang=EN-US>. </SPAN>그러나 호라즘샤는 그 중<SPAN lang=EN-US> 1</SPAN>명을 살해하고<SPAN lang=EN-US>, </SPAN>다른 사람의 수염을 밀어버리고 쫓아냈다<SPAN lang=EN-US>. </SPAN>몽골인들은 전쟁과 외교를 같은 무게로 보았으며 사신의 처형은 곧 전쟁을 의미하였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SPAN class=tit16b><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호라즘<SPAN lang=EN-US>(Khwarezm)</SPAN>은</SPAN></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SPAN class=text131><SPAN style="mso-bidi-font-size: 9.0pt; mso-ansi-font-size: 9.0pt" lang=EN-US>1077</SPAN></SPAN><SPAN class=text131><SPAN style="mso-bidi-font-size: 9.0pt; mso-ansi-font-size: 9.0pt">년에 아무다리야강 하류 유역<SPAN lang=EN-US>, </SPAN>지금의 히바에 세워져<SPAN lang=EN-US> 1231</SPAN>년까지 존속했던 국가였다<SPAN lang=EN-US>. </SPAN></SPAN></SPAN></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굴림; mso-font-kerning: 0pt">셀주크왕조의 부장<SPAN lang=EN-US>(</SPAN>部將<SPAN lang=EN-US>) </SPAN>아누시티긴의 아들 쿠트브 웃딘 무하마드<SPAN lang=EN-US>(</SPAN>재위<SPAN lang=EN-US> 1097~1127</SPAN>년<SPAN lang=EN-US>)</SPAN>가 술탄에서 독립하여 우르겐치를 수도로 호라즘을 건설하였다<SPAN lang=EN-US>. </SPAN>아라비아인은 후와리즘이라 부르고 원<SPAN lang=EN-US>(</SPAN>元<SPAN lang=EN-US>)</SPAN>나라 사서에는 화자자모<SPAN lang=EN-US>(</SPAN>花刺子模<SPAN lang=EN-US>)</SPAN>라 기록되어 있다<SPAN lang=EN-US>. </SPAN>그 후 동방의 서요<SPAN lang=EN-US>(</SPAN>西遙<SPAN lang=EN-US>)</SPAN>와 연합하여 이란<SPAN lang=EN-US>, </SPAN>아프가니스탄으로 진출하여 대국이 되었다<SPAN lang=EN-US>.<BR><BR></SPAN></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원정에 앞서 징기즈칸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쿠릴타이에서 후계자 문제를 정리하기 위하여 징기즈칸이 큰아들 주치를 부르자 둘째아들 차가타이가 불같이 나오며<SPAN lang=EN-US> “</SPAN>아버지는 이 더럽고 추잡한 메르키트 개자식에게 제국을 넘기려는 것입니까<SPAN lang=EN-US>?”</SPAN>라고 외쳤다<SPAN lang=EN-US>. </SPAN>그러자 얼굴이 벌개진 주치는<SPAN lang=EN-US> “</SPAN>아버지가 아직 아무 말씀도 없으신데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SPAN lang=EN-US>?”</SPAN>라고 화를 냈다<SPAN lang=EN-US>. </SPAN>두 왕자가 멱살을 붙잡고 맞붙어 싸우게 되자 주위의 친족들과 장군들이 이들을 뜯어 말렸다<SPAN lang=EN-US>. </SPAN>주치의 계승은 분쟁을 낳게될 것이 확실하였다<SPAN lang=EN-US>. </SPAN>장내가 겨우 진정되자 징기즈칸이 입을 열었다<SPAN lang=EN-US>. “</SPAN>주치를 왜 나쁘게 말하는가<SPAN lang=EN-US>? </SPAN>큰아들은 주치가 아닌가<SPAN lang=EN-US>? </SPAN>앞으로 그런 말을 해서는 안된다<SPAN lang=EN-US>”</SPAN>라고 질책하였다<SPAN lang=EN-US>. </SPAN>차가타이는 바로 밑동생 오고타이 곁으로 가면서 대답하였다<SPAN lang=EN-US>. “</SPAN>큰 아들인 주치와 저 둘은 앞으로도 아버지께 힘을 보태겠습니다<SPAN lang=EN-US>. 3</SPAN>남인 오고타이야 말로 마음이 넓으니 그를 후계자로 하십시오<SPAN lang=EN-US>.” </SPAN>차가타이의 말에 징기즈칸은<SPAN lang=EN-US> “</SPAN>주치도 의견을 말하라<SPAN lang=EN-US>”</SPAN>하자<SPAN lang=EN-US> “</SPAN>저도 한마음으로 아버지께 힘을 바치겠습니다<SPAN lang=EN-US>”</SPAN>라 하였다<SPAN lang=EN-US>. “</SPAN>오고타이의 의견은 어떤가<SPAN lang=EN-US>?” “</SPAN>황망하오나 저는 진력을 다하겠습니다<SPAN lang=EN-US>.” </SPAN>일찍이 징기즈칸은<SPAN lang=EN-US> “</SPAN>규범과 지혜를 배우려는 자는 차가타이에게 가고<SPAN lang=EN-US>, </SPAN>관용과 은사<SPAN lang=EN-US>, </SPAN>그리고 부귀를 구하는 자는 오고타이에게 가라<SPAN lang=EN-US>. </SPAN>용기와 명예<SPAN lang=EN-US>, </SPAN>그리고 불퇴전의 정복의지를 찾는 자는 톨루이를 따라라<SPAN lang=EN-US>” </SPAN>하였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은 후계자로서 능력보다는 포용력이 있는 오고타이에게 제국을 맡기기로 하였다<SPAN lang=EN-US>. </SPAN>이로서 징기즈칸은 주치가 메르키트의 피를 받았다는 것을 겉으로는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주치는 깊은 상처를 받았다<SPAN lang=EN-US>. </SPAN>그는 자신의 상처를 들쑤시는 차가타이에 대하여 두고두고 한을 품게 되었다<SPAN lang=EN-US>. </SPAN>차가타이도 후계자를 논할 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격하게 충돌한 이후 주치를 전과 같이 대하기가 힘들었다<SPAN lang=EN-US>. </SPAN>두 사람은 마음속에 커다란 응어리를 갖게 되었다<SPAN lang=EN-US>. <BR><BR><o:p></o:p></SPAN></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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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STRONG>서요<SPAN lang=EN-US>(</SPAN>카라키타이<SPAN lang=EN-US>)</SPAN>와 중앙아시아 정복<BR><BR><SPAN lang=EN-US><?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SPAN></STRONG></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징기즈칸</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은<SPAN lang=EN-US> 1216</SPAN>년 자신의 숙적이던 메르키트족 톡토아의 동생 호두가 부민들을 모아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몽골본토로 돌아왔다<SPAN lang=EN-US>. 1217</SPAN>년 메르키트족에 대한 출정 준비가 완료되자<SPAN lang=EN-US>, </SPAN>그는 수베테이와 토쿠차르에게 메르키트족을 전부 죽여버릴 것을 명령하였고 이에 따라 패배한 메르키트족은 톡토아의 막내아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살해되었다<SPAN lang=EN-US>. </SPAN>이어서 삼림민이던 호리 투마트족에 대한 원정을 감행하였다<SPAN lang=EN-US>. </SPAN>코르치는 자신의 예언대가로 </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징기즈칸</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으로부터 투마트족 출신의 미녀<SPAN lang=EN-US> 30</SPAN>명을 차지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투마트족 정벌에 나섰으나 거기서 거꾸로 그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SPAN lang=EN-US>. </SPAN>이에 </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징기즈칸</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은 삼림민의 행태를 잘 알고있던 오이라트족의 수령 쿠두카를 보냈는데 그 역시 포로가 되었다<SPAN lang=EN-US>. </SPAN>이렇게되자 </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징기즈칸</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은 보로쿨을 보냈다<SPAN lang=EN-US>. </SPAN>그는 본대와 떨어져 앞서가다가 밤중에 투마트초병의 급습을 받아 살해되고 말았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분노에 찬 </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징기즈칸</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은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보로쿨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하려하였으나<SPAN lang=EN-US>, </SPAN>주위의 만류로 되르벤족 출신의 한 장군을 뽑아 엄격한 지시를 내리고 영원한 하늘에 대해 기도를 올린 뒤 출정시켰다<SPAN lang=EN-US>. </SPAN>투마트족은 잔치를 벌이던 도중 습격을 받아 패배하였고<SPAN lang=EN-US>, </SPAN>투마트족 수령의 둔영에 잡혀있던 코르치와 쿠두카는 풀려나게 되었다<SPAN lang=EN-US>. </SPAN>코르치는 약속대로<SPAN lang=EN-US> 30</SPAN>명의 미녀를 차지하였고<SPAN lang=EN-US>, </SPAN>쿠두카는 투마트족 수령의 부인인 보도쿠이 타르쿤을 차지하였다<SPAN lang=EN-US>. </SPAN>또<SPAN lang=EN-US> 100</SPAN>명의 투마트인이 보로쿨의 장례식에 바쳐졌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투마트족에 대한 원정시 몽골군에게 원군을 보내기를 거부한 키르기즈족 등 삼림민들의 독립의지를 완전히 꺾어놓기 위해 </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징기즈칸</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은 큰아들 주치를 보냈다<SPAN lang=EN-US>. </SPAN>주치는 쿠두카가 오이라트가 있는 곳을 안내하자 시크시트에서 그들을 복속시켰다<SPAN lang=EN-US>. </SPAN>그뒤 주치는 오이라트<SPAN lang=EN-US>, </SPAN>부리야트를 비롯한 다른 삼림부족들을 차례로 정복하였고 키르기즈도 굴복시켰다<SPAN lang=EN-US>. </SPAN>복속한 부족의 수령들은 충성의 표시로 하얀 말과 하얀 매 그리고 검은 담비털을 가져왔고<SPAN lang=EN-US>, </SPAN>주치는 오이라트와 키르기즈의 수령들을 데리고 돌아왔다<SPAN lang=EN-US>. </SPAN></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징기즈칸</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은 쿠두카의 봉사에 대한 대가로 그의 아들들에게 황녀들을 아내로 주었고 주치에게는 삼림민을 주고 다음과 같이 칭찬하였다<SPAN lang=EN-US>. “</SPAN>나의 큰아들이여<SPAN lang=EN-US>, </SPAN>너는 처음으로 집을 나서서 일을 아주 잘 끝냈다<SPAN lang=EN-US>. </SPAN>너는 행운의 삼림민들을 복속시킨 뒤 그들의 말과 사람을 해치지도 않고 무사히 돌아왔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징기즈칸</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의 적중에 유일한 생존자가 있었으니<SPAN lang=EN-US>, </SPAN>그는 바로 나이만족 타양칸의 아들인 쿠출루크였다<SPAN lang=EN-US>. </SPAN>그는 이르티쉬 강가에서의 패전 이후 고향땅인 알타이에서 아버지와 백성들을 잃자 메르키트의 잔당들과 함께 동투르키스탄으로 갔지만 위그르의 이디쿠트인 바르축에게도 몰려 서요<SPAN lang=EN-US>(</SPAN>카라키타이<SPAN lang=EN-US>)</SPAN>의 군주 구르칸에게로 도망쳤다<SPAN lang=EN-US>. </SPAN>중앙아시아의 투르키스탄은 </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징기즈칸</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 침입 이전에 서위그르<SPAN lang=EN-US>, </SPAN>서요<SPAN lang=EN-US>, </SPAN>호라즘 등 세 왕국이 통치하고 있었다<SPAN lang=EN-US>. </SPAN>투르크계 왕조 서위그르는 톈산<SPAN lang=EN-US>(</SPAN>천산<SPAN lang=EN-US>)</SPAN>산맥 동쪽의 동투르키스탄에<SPAN lang=EN-US>, </SPAN>서요는 탈라스 지방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고<SPAN lang=EN-US>, </SPAN>호라즘은 이란화된 투르크계 왕조로서 서투르키스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SPAN lang=EN-US>. </SPAN>서요<SPAN lang=EN-US>(</SPAN>카라키타이<SPAN lang=EN-US>)</SPAN>는 중국의 거란이<SPAN lang=EN-US> 1125</SPAN>년 멸망한 후 거란족의 지도층이 서진<SPAN lang=EN-US>, </SPAN>톈산북로를 통과하여 돌궐<SPAN lang=EN-US>(</SPAN>투르크<SPAN lang=EN-US>)</SPAN>계 칼라한 왕조를 멸망시키고 그 땅에 왕조를 재건한 것이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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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SPAN lang=EN-US><o:p><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B style="mso-bidi-font-weight: 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거란의 독립운동<BR><BR></SPAN></B><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 lang=EN-US><?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몽골과 금나라의 전투에서 몽골군의 우위는 요동지방에 영향을 주었고 그 영향은 또 금나라에 타격을 주었다<SPAN lang=EN-US>. </SPAN>몽골이 금나라를 공격하자 금나라는 피지배민인 거란족<SPAN lang=EN-US>(</SPAN>키타이족<SPAN lang=EN-US>)</SPAN>이 몽골과 내통할 것을 두려워하여 거란인<SPAN lang=EN-US> 1</SPAN>호당 여진인<SPAN lang=EN-US> 2</SPAN>호에 끼워 살게 하였다<SPAN lang=EN-US>. </SPAN>의심을 받는다고 느낀 거란족 약<SPAN lang=EN-US> 10</SPAN>만이<SPAN lang=EN-US> 1212</SPAN>년 거란제국의 왕족이었던 야율유가를 도원수로 하여 요동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몽골군에 동맹을 요청하였다<SPAN lang=EN-US>. </SPAN>금나라가 직접 감시하는데 대한 공개적인 반란이었다<SPAN lang=EN-US>. </SPAN>몽골은 즉각 사자를 보내 야율유가와 교섭한 후 쌍방의 대표가 금산에 올라가 백색 말과 소를 제물로 바치고 북쪽을 향하여 활을 꺾는 동맹의식을 행하고 제베가 거느리는 군대를 파견하였다<SPAN lang=EN-US>. </SPAN>여기서 거란군과 제베의 군사가 합세해서 금나라 요양을 공략하게 되었다<SPAN lang=EN-US>. </SPAN>제베는 계략을 써 후퇴를 가장해서 주위에 복병을 남겨 두어 적이 안심한 틈을 타 일제히 공격하여 성을 함락시켰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 lang=EN-US>1213</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년 춘삼월 금나라 완안호사는 본대를 이끌고 걸석열환단은 지대를 인솔하여 요동으로 진격하였다<SPAN lang=EN-US>. </SPAN>전장은 장춘 부근으로 금나라의 지대는 승리하였으나 본대가 패하여 금나라의 국경은 서북의 옹구트족 쪽과 마찬가지로 동북의 거란족 쪽으로도 무방비상태가 되었다<SPAN lang=EN-US>. </SPAN>금나라는 패장 완안호사에 대신하여 포선만노를 요동군의 사령관에 임명하였다<SPAN lang=EN-US>. </SPAN>포선만노는 야율유가를 공격하였으나 패하였으며 그의 부장격이었던 완안철가와도 대립하여 그를 처형하고 나서 이 죄를 물을까 두려워하여 남쪽 개봉으로 천도한 금나라에 반기를 들어 대진국을 세우고 스스로를 천왕이라 불렀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패전을 계속하는 금나라에 실망한 요동의 여진인은 포선만노의 독립을 지지하였다<SPAN lang=EN-US>. </SPAN>포선만노의 적은 야율유가의 거란 정권과 금나라의 장군 걸석열환단이었다<SPAN lang=EN-US>. </SPAN>포선만노는 금나라 군에 밀려 동북으로 후퇴하여 틀어 박혔다<SPAN lang=EN-US>. </SPAN>그후 포선만노 정권은 몽골에게 복속과 반역을 반복하였는데 징기즈칸의 아들 오고타이의 대에 멸망되어 요동에서 여진세력은 사실상 사라졌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한편 야율유가는 무칼리와 함께 케룰렌강 부근의 둔영지에서 징기즈칸을 만났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은 야율유가가 의를 따라 돌아왔다고 기뻐하며 그를 요동왕으로 공식 인정하고 그를 보좌하는 몽골인 부왕을 두었다<SPAN lang=EN-US>. </SPAN>위그르와 함께 거란은 몽골에 합류함으로서 몽골제국 안에서 자치권을 얻었다<SPAN lang=EN-US>. </SPAN>그의 부하들은 그에게 제왕을 칭하라고 권하였으나 신중한 그는 이것을 물리치고 죽을 때<SPAN lang=EN-US>(1220</SPAN>년<SPAN lang=EN-US>)</SPAN>까지 몽골에 충성하였다<SPAN lang=EN-US>. </SPAN>그러나 이에 불만을 품은 자들은 따로 자립하였지만<SPAN lang=EN-US> 70</SPAN>여일 후 야율유가<SPAN lang=EN-US>-</SPAN>몽골 연합군에게 토벌되었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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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id=SG_ArticleSubHeadLine class=articleView-M-Ts>가장 아름답고 매혹적인 악기… 사람의 음성과 비슷해 놀라워<BR>흐느끼는 듯한 슬픈 소리 호소력</DIV>
<DIV id=SG_ArticleBody class=articleView2>
<DIV style="DISPLAY: none" id=SG_ArticleID class=articleView-T>20110303004282</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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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B style="mso-bidi-font-weight: 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징기즈칸 리더십<BR><BR><SPAN lang=EN-US><?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SPAN></SPAN></B></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① 첫 번째 징기즈칸의 리더십 중에 주목 받을 점은 그의<SPAN lang=EN-US> '</SPAN>웅대한 비전'이다<SPAN lang=EN-US>.<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일찍이 과거에도 없었고 누구도 가능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 가능하게 만든 대단한 비전이다<SPAN lang=EN-US>. </SPAN>그의 비전이 처음부터 컸던 것은 아니었다<SPAN lang=EN-US>. 17</SPAN>살의 어린 소년 테무진이 타타르족의 습격으로 아버지를 잃고 그의 부족은 모조리 흩어 졌으며 자신은 포로로 잡혀 끌려가는 신세에 처해졌다<SPAN lang=EN-US>. </SPAN>이때 그가 가진 목표는 '흩어진 부족을 되찾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것'이었다<SPAN lang=EN-US>. '</SPAN>할 일이 있는 한 나는 죽을 수 없다'라는 그의 말과 같이 온갖 모험과 역경을 거쳐 마침내 그 소원을 이루었는데<SPAN lang=EN-US>, </SPAN>테무진의 결론은 그의 부족들이 <SPAN lang=EN-US>‘</SPAN>공동의 목표<SPAN lang=EN-US>’</SPAN>가 있으니 더 잘 뭉친다는 것이었다<SPAN lang=EN-US>. </SPAN>그리고 그 같은 공동의 목표는 소박하거나 곧 이룩될 만한 작은 것에서는 별반 효과가 없었으며<SPAN lang=EN-US>, </SPAN>원대야망한 것이라야 사람들이 큰 힘을 낸다는 것이었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 리더십의 면면에는 한가지 공동목표가 달성되기가 무섭게 곧 다음의 새로운 공동목표를 만들어 쉬지 않고 달려야만 존재할 수 있다는 듯이 그의 부족을 이끌어 갔다<SPAN lang=EN-US>. </SPAN>그리고 그 비전은 나라를 만드는 것<SPAN lang=EN-US>, </SPAN>주변국가로부터의 위협을 없애는 것<SPAN lang=EN-US>, </SPAN>아예 중원을 경영하는 것<SPAN lang=EN-US>, </SPAN>나아가 천하를 통일하는 것<SPAN lang=EN-US>, </SPAN>그리고 그 천하는 중국 땅을 넘어 사람이 살고 있는 모든 땅으로 계속 커져만 갔으며<SPAN lang=EN-US>, </SPAN>그 꿈들을 하나 하나 실현시켜 나갔다<SPAN lang=EN-US>. <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② 두 번째는 명분과 정당성의 확보이다<SPAN lang=EN-US>.<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부족들은 명예를 중시하고 이름 석자에 대한 오명을 몹시도 싫어한다<SPAN lang=EN-US>. </SPAN>항상 그들은 옳은 쪽으로 평가 받기를 원한다<SPAN lang=EN-US>. </SPAN>청군 아니면 백군인 상태의 전쟁이 아니라 자신들은 정의의 편이라는 생각으로 싸우게 하도록<SPAN lang=EN-US>, </SPAN>같은 전쟁을 하더라도 명분이 없는 전쟁을 하지 않았다<SPAN lang=EN-US>. </SPAN>금나라<SPAN lang=EN-US> 100</SPAN>만 대군을 칠 때도 그 명분은 나라를 물려 받지 못할 불효한 놈이 천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명분이었다<SPAN lang=EN-US>. </SPAN>그리고 백성들에게는 일종의 해방전쟁이라는 명분을 걸고 땅을 빼앗거나 명분 없는 약탈을 자제시켰다<SPAN lang=EN-US>. <BR><BR><o:p></o:p></SPAN></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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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금나라의 천도는 두 마음이 있다는 증거였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은 노하여<SPAN lang=EN-US> 1214</SPAN>년 가을 사무카와 석말명안의 총 지휘하에 행동을 개시하였다<SPAN lang=EN-US>. </SPAN>완안복흥은 개봉에 위급을 고하였다<SPAN lang=EN-US>. </SPAN>몽골군의 진군이 알려지자 많은 성밖의 사람들이 성안으로 피난하였다<SPAN lang=EN-US>. </SPAN>몽골의 전위 특수부대원들은 중국인 농부로 가장한 후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밤낮없이 달려왔다<SPAN lang=EN-US>. </SPAN>말들이 달리다 지쳐 쓰러지자 마지막에는 걸어서 중도로 들어가는 피난민 대열에 섞여 성문 앞에 도달하였다<SPAN lang=EN-US>. </SPAN>이들은 성문 앞에서 삼엄한 조사를 무사히 통과하였다<SPAN lang=EN-US>. </SPAN>군량을 가지고 오던 금나라의 증원군이 중도와 하간 사이의 패주에서 몽골군의 습격으로 격파되어 흩어지자 피난민으로 북새통을 이룬 중도는 식량이 동이나 인육을 먹는 형편이 되었다<SPAN lang=EN-US>.<BR><BR><?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이윽고 몽골군이 중도로 접근하자 성문은 닫히고 파수병들은 방어태세로 들어갔다<SPAN lang=EN-US>. </SPAN>성안의 몽골 특수부대원들은 각 지역으로 흩어져 민가에 금나라군의 방어용 무기인 살상용 불기름으로 불을 놓기 시작하였으며 몽골군이 이미 시내까지 들어와 싸우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SPAN lang=EN-US>. </SPAN>시내의 이곳 저곳에서 시커먼 불기둥이 타오르고 민심이 흉흉해져 사람들은 관가와 저자거리를 털기 시작하였다<SPAN lang=EN-US>. </SPAN>병사들도 자리를 이탈하여 약탈과 강도<SPAN lang=EN-US>, </SPAN>강간<SPAN lang=EN-US>, </SPAN>살인에 끼어들어 중도는 생지옥이 되었다<SPAN lang=EN-US>. </SPAN>절망한 중도 유수 완안복흥은 자결해버렸으며 석말진충은 부하를 데리고 탈출하여 개봉에 들어갔으나 패전의 책임을 물어 처형되었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거란족 출신인 석말명안은 몽골군을 이끌고 입성하였고 당시 장성의 건너편 드론 노르 호수가의 환주에서 더위를 피하며 머물던 징기즈칸은 자신의 양자인 시기 쿠두쿠를 보내 성내의 재물을 환수케 하였다<SPAN lang=EN-US>. </SPAN>그 뒤 중도는 한달 동안 약탈이 허용되었으며 수천명의 주민들이 죽고 도시전역이 화염 속에 소멸되었다<SPAN lang=EN-US>. </SPAN>당시 몽골인은 도시경제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으므로 금<SPAN lang=EN-US>, </SPAN>은<SPAN lang=EN-US>, </SPAN>보석의 약탈과 살육<SPAN lang=EN-US>, </SPAN>방화 등으로 도시를 파괴하였다<SPAN lang=EN-US>. 10</SPAN>세기의 거란이나<SPAN lang=EN-US> 12</SPAN>세기의 여진인은 최소한의 살육으로 왕조를 계승한 후 그들의 재산이 될 것은 파괴하지 않았으나 징기즈칸의 몽골인들은 무제한적 파괴만 있었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지금까지 금나라에 대한 몽골의 원정은 약탈전과 복수전의 성격을 띠어<SPAN lang=EN-US>, </SPAN>노예와 가축과 재물을 얻기 위한 유목민의 전투였다<SPAN lang=EN-US>. </SPAN>그러나 이제 거란과 한족출신 참모들의 영향으로 전쟁목적은 수정되었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은 금나라 황제에게 함락된 모든 영토의 할양을 요구하였고<SPAN lang=EN-US>, </SPAN>아직 함락되지 않은 하북과 산동의 모든 지역을 바칠 것과<SPAN lang=EN-US>, </SPAN>황제는 스스로 황제의 칭호를 포기하고 하남 왕일 것을 명령하였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황하의 북측지역은 무정부상태로 되어 대소의 무장세력이 자생적으로 일어났다<SPAN lang=EN-US>. </SPAN>또 중앙의 명령을 받을 수 없었던 지방의 군단들은 독립군벌로 변해갔다<SPAN lang=EN-US>. </SPAN>금나라의 고향 만주는 연락이 끊어져 속속 몽골에 집단 투항하였으며 몽골은 내몽골 초원과 예전 거란의 연운<SPAN lang=EN-US>16</SPAN>주를 손에 넣었다<SPAN lang=EN-US>. </SPAN>금나라의 영역은 이제 그 새수도인 개봉 일원을 중심으로 섬서성의 일부 요새와 하남성 지역 정도로 축소되었다<SPAN lang=EN-US>. </SPAN>이리하여 금나라는 하남과 협서를 가진 지방정권으로 전락하였으며 몽골은 아시아 동방의 강자가 되었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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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 lang=EN-US>1211</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년은 금나라에게 악몽이었다<SPAN lang=EN-US>. </SPAN>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였다<SPAN lang=EN-US>. 1212</SPAN>년 가을 몽골군은 다시 돌아와 공세를 취하였다<SPAN lang=EN-US>. </SPAN>이번에도 몽골은 많은 지역을 다시 석권하고 중도 다음으로 금에게 중요한 산서 북부의 서경<SPAN lang=EN-US>(</SPAN>대동<SPAN lang=EN-US>)</SPAN>을 포위하였다<SPAN lang=EN-US>. </SPAN>그러나 징기즈칸이 화살에 맞았기 때문에 포위를 풀고 북쪽으로 퇴각하였다<SPAN lang=EN-US>. </SPAN>서경은 다시 금나라에게 돌아갔다<SPAN lang=EN-US>. </SPAN>몽골은 이러한 고전을 통하여 공성기법의 전문성과 공성공병 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SPAN lang=EN-US>. </SPAN>이 문제는 결국 금나라에 적대적인 한족들을 징발하여 해결하였다<SPAN lang=EN-US>.<BR><BR><?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 lang=EN-US>1213</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년 가을 세 번째의 몽골 침략은 가공할 만하였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은 앞서 두 번의 경험을 바탕으로 일대 공세를 펴 결정적인 승리를 차지하였다<SPAN lang=EN-US>. </SPAN>야호령을 넘어 거침없이 진격하던 몽골군은 전과 달리 거용관 북구에서 진격을 멈췄다<SPAN lang=EN-US>. </SPAN>금나라군이 거용관에 철제 관문을 달아 대비하고 있었다<SPAN lang=EN-US>. </SPAN>먼저 제베는 중앙 전위부대를 이끌고 거용관 관문 입구를 향해 쳐들어가는 척 하다가 곧 자기 휘하부대를 이끌고 허겁지겁 퇴각하였다<SPAN lang=EN-US>. </SPAN>금나라 병사들은 그가 정말로 퇴각하는 줄 알고 추격해왔다<SPAN lang=EN-US>. </SPAN>유도작전을 위한 위장된 퇴각이었다<SPAN lang=EN-US>. </SPAN>제베는 적의 추격에 걸릴 듯 걸릴 듯하며 추격해오는 적을 멀리까지 유인해 갔다<SPAN lang=EN-US>. </SPAN>그들은 이렇듯 계략이 있는 줄도 모르고 깊숙히 추격해 갔다<SPAN lang=EN-US>. </SPAN>이때 퇴각하던 제베의 전위대가 갑자기 반격을 시작했다<SPAN lang=EN-US>. </SPAN>그 뒤쪽에는 징기즈칸이 직접 지휘하는 중앙군의 본대가 돌격해 왔다<SPAN lang=EN-US>. </SPAN>적의 시체는 나무토막처럼 쌓였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적을 완전히 소탕한 몽골군은 회래에서 거용관에 이르는 길을 완전히 장악하였다<SPAN lang=EN-US>. </SPAN>즉 <SPAN lang=EN-US>7, </SPAN><SPAN lang=EN-US>8</SPAN>월에 걸쳐 광활한 일대를 지키는 요새도시, 화산으로 둘러싸여 노란 바람이 부는 선화를 점령하였고, 여기서 다시 톨루이를 공격선발대로 삼아 남동쪽으로 요새화된 보안을 크게 쳐부쉈다<SPAN lang=EN-US>. </SPAN>이로서 장가구와 북경을 연결하는 길이 장악되면서 승리의 전기가 마련되었다<SPAN lang=EN-US>. </SPAN>몽골군은 장가구 근처의 선덕부와 부주를 손에 넣었고<SPAN lang=EN-US>, </SPAN>위녕성의 방위를 지휘하던 유백림도 투항하였다<SPAN lang=EN-US>. </SPAN>몽골은 선덕에서의 승리를 시초로, 덕흥을 부수고 거용관의 북쪽입구에 육박하였다<SPAN lang=EN-US>. </SPAN>금나라는 협상을 위해 징기즈칸을 알고 있던 거란인 석말령안을 보냈으나 그는 몽골측으로 돌아서 버렸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거용관에는 인적도 드물고 대낮에도 어두운<SPAN lang=EN-US> 22km</SPAN>의 산길이 뻗어 있었고, 양편에는 험준한 절벽인 천연적인 요새에 인공적인 성곽으로 연결되어 있었다<SPAN lang=EN-US>. 적이 쳐들어 오기 전에 금나라는 </SPAN>이 장성의 하단문을 철제로 바꾸었고 지면에 장해물을 설치하였으며, 그리고 정예부대로 방위를 세웠다<SPAN lang=EN-US>. </SPAN>당시 금나라는<SPAN lang=EN-US> 12</SPAN>만 정도의 여진족 기병과 약 <SPAN lang=EN-US>45</SPAN>만의 한족 보병으로 구성된 <SPAN lang=EN-US>60</SPAN>만 대군을 보유하였고<SPAN lang=EN-US>, </SPAN>몽골 침공군의 병력은 다른 부족의 지원병 약<SPAN lang=EN-US> 1</SPAN>만을 포함하여<SPAN lang=EN-US> 6</SPAN>만<SPAN lang=EN-US>5</SPAN>천명 정도였다<SPAN lang=EN-US>. </SPAN>몽골병사는 그곳에서 제지되었다<SPAN lang=EN-US>. </SPAN></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징기즈칸은 거용관의 견고함을 보고 작전을 변경하였다<SPAN lang=EN-US>. </SPAN>즉 한 부대로 감시시키면서 자신들은 대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돌아 비호령을 넘어 자형구(역주)를 쳤다<SPAN lang=EN-US>. </SPAN>이후 징기즈칸은 제베에게 명하여 경무장한 소부대를 이끌고 거용관 남구의 금군 본영을 기습케 하여, 남북 양쪽에서 협격토록 함으로써 거용관을 함락시켰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은 탁주로 내려왔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은 탁주를 취한 후 바로 중도로 진격하지 않고 군사를 세 방면으로 나누어 진격시켰다<SPAN lang=EN-US>. </SPAN>주치<SPAN lang=EN-US>, </SPAN>차가타이<SPAN lang=EN-US>, </SPAN>오고타이의 세아들은 우익군<SPAN lang=EN-US>, </SPAN>동생 카사르와 테무게 옷치긴은 좌익군<SPAN lang=EN-US>, </SPAN>칸 자신은 막내아들 톨루이와 함께 중군을 지휘하였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몽골의 우익군은 보정에서 태행산맥을 따라 하북성을 남하하였다<SPAN lang=EN-US>. </SPAN>이들은 하남성 북쪽에서 황하에 부딪치자 태행산맥의 남단을 서쪽으로 돌아 산서성으로 나왔다<SPAN lang=EN-US>. 그러면서</SPAN> 이들은 그 근처 도시를 하나 하나 점령하였다<SPAN lang=EN-US>. </SPAN>이후 금나라의 중요한 거점인 고북고와 대동 등을 점령하였다<SPAN lang=EN-US>. </SPAN>대동은 만리장성이 두 줄로 되는 해발<SPAN lang=EN-US> 1300m</SPAN> 지점에 있는 성곽으로 산서성을 지키는 요지였다<SPAN lang=EN-US>. </SPAN>이 도시는 옛부터 난공불락이었으나 몽골인 특유의 병법에 의해 무너졌다<SPAN lang=EN-US>. 몽골 우익군은</SPAN> 산서 중부를 돌파하여 태원과 평양을 빼앗았으나<SPAN lang=EN-US>, </SPAN>약탈물을 북으로 가져가기 위하여 다시 철수하였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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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케룰렌 하반에는<SPAN lang=EN-US> 1</SPAN>만명의 케식텐 외에도 몽골부족군<SPAN lang=EN-US> 12</SPAN>만명이 모였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은 있을지도 모를 케레이트족이나 나이만족 등의 반란에 대비하여 콩기라트부의 타후차르에게<SPAN lang=EN-US> 2</SPAN>천명의 군대를 주어 고향에 남도록 한 뒤, 남은 전 복속 부족민들을 이끌고 고비사막을 건너 남하하였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은<SPAN lang=EN-US> 4</SPAN>만명의 우익군을 주치<SPAN lang=EN-US>, </SPAN>차가타이<SPAN lang=EN-US>, </SPAN>오고타이에게 주어 토르강에서 옹구트부 지역으로 남하하게 하고<SPAN lang=EN-US>, </SPAN>자신은 무칼리와 함께 중군을 이끌고 제베<SPAN lang=EN-US>, </SPAN>수베데이<SPAN lang=EN-US>, </SPAN>조치 카사르와 막내아들 톨루이에게 맡긴 좌익과 함께 총<SPAN lang=EN-US> 7</SPAN>만명이 케룰렌강에서 동남쪽으로 내려갔다<SPAN lang=EN-US>. </SPAN>춘<SPAN lang=EN-US> 3</SPAN>월에는 눈이 녹아 물을 얻을 수 있고 덥지 않아 대사막을 건너는 데에는 적합한 때였다<SPAN lang=EN-US>. 1211</SPAN>년<SPAN lang=EN-US> 5</SPAN>월 징기즈칸은 고비남쪽 내몽골 초원에 자리잡고 있는 동맹부족 옹구트 지구에 다다르자 행군을 멈추고 병사와 말을 쉬게 하였다<SPAN lang=EN-US>.<BR><BR><?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옹구트족은 금나라와 주종관계에 있었지만 징기즈칸과는 나이만전에서부터 인연을 맺어왔던 부족이었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은<SPAN lang=EN-US> 1206</SPAN>년의 대대적인 논공행상 때 그들 부족장을 새로운 몽골제국의 고관으로 대접하고 딸 아라가이 베키를 그들 족장의 세자 패요랍한테 시집을 보냈다<SPAN lang=EN-US>. </SPAN>옹구트족은 만리장성의 북방 접근로인 산서성 북부 외곽지대를 지키는 금나라의 파수병 노릇을 하였는데 이러한 정략결혼으로 옹구트는 징기즈칸에게 변경지역을 넘겨주었고 침공로를 열어주었으며 지원군도 보냈다<SPAN lang=EN-US>. 또한 </SPAN>난하 상류에 근거를 두고 징기즈칸에게 투신한 거란 호족 야율아해와<SPAN lang=EN-US> 야율</SPAN>독화 형제도 금나라 북방을 지키는 거란족 장군과 연락이 닿아 있었다<SPAN lang=EN-US>. </SPAN>당시 금나라의 정규군 맹안모극군은<SPAN lang=EN-US> 27</SPAN>만명이었고, 여기에 이민족으로 이뤄진 규군과 지방군인 화모군이 따로 있었다. 그러나 몽골통일의 의미를 잘 모르는 새 황제는 주력을 남송경계에 배치하고 있었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난하 상류에 도착한 징기즈칸은 한여름을 그곳에서 보내고<SPAN lang=EN-US> 8</SPAN>월에 옹구트 부장 알라쿠시를 앞세워 대청산을 넘는 우익군을 기다렸다가 마침내 행동을 개시하였다<SPAN lang=EN-US>. </SPAN>야율아해가 선도한 우익군은 서경<SPAN lang=EN-US>(</SPAN>다퉁<SPAN lang=EN-US>, </SPAN>대동<SPAN lang=EN-US>)</SPAN>방면으로 공격하였고<SPAN lang=EN-US>, </SPAN>야율독화가 안내한 좌익군은 내몽골 초원에서 중원으로 들어가는 요충인 야호령으로 진격했다<SPAN lang=EN-US>. </SPAN>금나라는 옹구트가 몽골군에 가담한 줄도 모르고 방책에 의지하여 안심하고 있었다<SPAN lang=EN-US>. </SPAN>뒤늦게 급보를 받은 금의 주력은 야호령 근처 오사보에 방어진지를 구축했지만 제베가 이끈 몽골 좌익군이 우회해 이를 격파했다<SPAN lang=EN-US>. </SPAN>금나라 군사는 전원이 남방에 있는 천혜의 요새 야호령으로 후퇴하였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의 대군이 무주를 유린하면서 야호령으로 육박하자 금나라의 최고사령관인 완안승유는<SPAN lang=EN-US> 40</SPAN>만의 정예군단을 이끌고 야호령으로 향했다<SPAN lang=EN-US>. </SPAN>그러자 야호령에서 몽골군은 두 군데로 공격을 감행하였다<SPAN lang=EN-US>. </SPAN>공격하기 전 제베는 몽골 돌격대를 모아놓고 몽골군이 금나라에 대한 두려움을 버리고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초전부터 이들을 박살내는데 있다고 하였다<SPAN lang=EN-US>. </SPAN>이들은 징기즈칸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최전방의 결사대로서 죽음만이 그들의 영혼을 쉬게 해주는 고향이었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먼저 몽골의 돌격대가 성난 파도처럼 금나라 군에 뛰어들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칼을 휘둘렀다<SPAN lang=EN-US>. </SPAN>금나라군은 돌격하는 이들에게 불덩이 기름을 퍼부었다<SPAN lang=EN-US>. </SPAN>그렇지만 불을 끄려고 땅에 구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타고 있는 말들이 숯이 되어 넘어질 때까지 달리면서 싸우고 베었다<SPAN lang=EN-US>. </SPAN>이들은 말이 쓰러지자 맨 땅위에서 타 죽을 때까지 고통을 나타내거나 울부짖지도 않고 까맣게 타들어 가는 손으로 계속 칼을 휘둘러 살육하였다<SPAN lang=EN-US>. </SPAN>금나라군은 두려움을 느껴 전열을 흩으려 뒤에 도착하는 우군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SPAN lang=EN-US> 금나라군은 </SPAN>대혼란을 일으켰고 그리고 이들은 뒤따라오는 몽골 기마병에게 짓밟히거나 죽임을 당하였다<SPAN lang=EN-US>. </SPAN>제베는 이들에게 질서있게 퇴각하여 재정비할 시간을 주지 않고 철저히 궤멸시켰다<SPAN lang=EN-US>. </SPAN>살육전의 이야기를 들은 다른 금나라 군사들도 몽골군에게 놀라움을 갖게 되었다<SPAN lang=EN-US>. 이제 그들은 </SPAN>이전의 몽골군이 아니었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금나라는 다시 완안승유의 지휘하에 제<SPAN lang=EN-US>3</SPAN>의 천혜요새인 선평에 대군을 집결시켜 저항하였으나 오래가지 못해 무너졌다<SPAN lang=EN-US>. </SPAN>완안승유의 정예군과 몽골군은 회하보라는 곳에서 또다시 싸웠지만 금나라 정예군도 전멸되고 말았다<SPAN lang=EN-US>. </SPAN>회하보의 패전은 금나라에게 엄청난 공포를 가져다주었다<SPAN lang=EN-US>. </SPAN>다음의 목표는 몽골고원과 중국을 잇는 거용관으로 금나라는 이곳을 사수하였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은 이곳 거용관을 어떻게 통과해야할지 몰라 무슬림인 자파르를 불렀다<SPAN lang=EN-US>. </SPAN>자파르는 이 지방의 지리를 잘 알고있었다<SPAN lang=EN-US>. </SPAN>그는 빽빽한 숲 사이로 외길이 있어 그리로 국경을 통과할 수 있음을 알았으므로<SPAN lang=EN-US>, </SPAN>몽골군은 어둠을 틈타 말의 입에 제갈을 물리고 그의 안내에 따라 경계를 무사히 넘었다<SPAN lang=EN-US>. </SPAN>관문의 견고함을 믿고 안심하던 금나라 방위군은 잠든 사이에 급습을 받아 패하고 말았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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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TRONG>금나라를 정복하다<BR><BR><SPAN lang=EN-US><?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SPAN></STRONG></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금나라는 몽골의 각 부족들을 그의 지배하에 두었는데 몽골의 강성을 두려워하여 분할지배 정책을 취했다<SPAN lang=EN-US>. </SPAN>금나라는 몽골의 각 부족끼리 서로 싸우게 하고 가혹하게 약탈을 하였으며<SPAN lang=EN-US> 3</SPAN>년마다 몽골에 출병하여 각 지방을 순회하며 장정들을 죽여 없앴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은 금나라 정벌을 맹세했다<SPAN lang=EN-US>. <BR><BR></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SPAN lang=EN-US></SPAN></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굴림; mso-font-kerning: 0pt"><SPAN lang=EN-US><o:p><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 lang=EN-US>12</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세기 중반 금나라는 수도를 중국동북부에서 중도<SPAN lang=EN-US>(</SPAN>베이징<SPAN lang=EN-US>)</SPAN>로 옮겼다<SPAN lang=EN-US>. </SPAN>금나라의 병제는<SPAN lang=EN-US> 300</SPAN>호를 모극<SPAN lang=EN-US>(</SPAN>무게<SPAN lang=EN-US>), 10</SPAN>모극을 맹안<SPAN lang=EN-US>(</SPAN>밍간<SPAN lang=EN-US>)</SPAN>으로 하는 맹안모극제로서 이들도 왕을 따라 중국 내부로 이주하게 되었다<SPAN lang=EN-US>. </SPAN>이 편제는 성인 남성들은 평시에는 농업 등 생업에 종사하다가 전쟁이 나면 징집돼 종군하게 되어있었다<SPAN lang=EN-US>. </SPAN>그러나 중국 대륙으로 이주한 후 여진족은 태만하고 나약해졌으며 생활도 눈에 띄게 궁핍해졌다<SPAN lang=EN-US>. </SPAN>금나라 정부는 이런 처지에 빠진 여진인의 보호에만 치중하였기에 한인의 반발을 불러왔다<SPAN lang=EN-US>. 중국</SPAN> 내부에 정착한 여진족 무리는 중원의 풍요를 둘러싸고 내분과 부패를 일으키면서 만주 일대에 남은 무리들과 사이에 이질감을 낳았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징기즈칸이 금나라를 치려는 생각은 이전 토오릴에게 파견된 금나라 사신 야율아해를 만났을 때, 그로부터 '금나라는 무방비 상태로 사기가 떨어졌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였다<SPAN lang=EN-US>. </SPAN>그는 징기즈칸과 의기가 투합하여 그곳에서 외교고문역을 맡았다<SPAN lang=EN-US>. </SPAN>야율아해는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쏘는 것에 능하였고 거란어<SPAN lang=EN-US>, </SPAN>여진어<SPAN lang=EN-US>, </SPAN>중국어 그리고 몽골어에도 능하였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은 귀순자와 거란인 망명자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하기 시작하였다<SPAN lang=EN-US>. </SPAN>그는 이들로부터 중국 사정에 관한 정보를 얻기도 했지만 주로 금나라 내의 첩자들<SPAN lang=EN-US>, </SPAN>특히 무슬림 상인들이 가져다주는 정보에 무게를 두었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 자신도 정보수집에 참가하였다<SPAN lang=EN-US>. </SPAN>그는 공물을 인도한다는 명목으로 허실을 탐지하려 금나라에 갔다<SPAN lang=EN-US>. </SPAN>금나라 측도 이를 경계하여 칸을 국내에 들이지 않고 국경 밖에서 접대하였다<SPAN lang=EN-US>. </SPAN>금나라에 대한 또 하나의 정보원은 금의 바로 북쪽에 접하며 살고있는 몽골계 옹구트족이었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역사적으로 중국은 무한한 물자와 권위 등으로 유목민들을 유혹하였지만 대개는 변경 약탈전으로 끝났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 역시 금나라의 황제 알탄칸<SPAN lang=EN-US>(</SPAN>장종<SPAN lang=EN-US>)</SPAN>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에게 조공을 바쳤으며 신하노릇을 하였다<SPAN lang=EN-US>. 1207</SPAN>년부터 징기즈칸은 금나라에 당당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하였다<SPAN lang=EN-US>. 1208</SPAN>년 마침 금나라의 알탄칸이 사망하였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은 후계자의 즉위에 맞춰 주종관계를 청산하려 하였다<SPAN lang=EN-US>. </SPAN>그는 금나라 사신에게 새로운 군주가 누군가라고 묻고 사신이 위소왕(영제)이라고 하자 얼굴을 남쪽으로 돌리고 침을 뱉으며<SPAN lang=EN-US> “</SPAN>나는 중원의 황제는 천상의 사람이 하는 것이라고 들어왔는데<SPAN lang=EN-US>, </SPAN>이처럼 용렬한 자도 황제를 할 수 있다니 내 어찌 만날 수 있겠는가<SPAN lang=EN-US>” </SPAN>하였다<SPAN lang=EN-US>. </SPAN>이때부터 몽골과 금나라 사이에는 본격적인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은 그 동안 중국에서 들어오던 물자를 직접 확보해야만 하였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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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굴림; mso-font-kerning: 0pt"><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굴림; mso-font-kerning: 0pt">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STRONG>탕구트(서하)와의 전쟁<BR><BR><SPAN lang=EN-US><?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SPAN></STRONG></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징기즈칸은 칸이 되기 전부터 거란인<SPAN lang=EN-US>(</SPAN>키타이인<SPAN lang=EN-US>)</SPAN>이나 여진인 등<SPAN lang=EN-US>, </SPAN>금나라에서 이탈하여 온 사람들을 참모로 삼았다<SPAN lang=EN-US>. </SPAN>특히 거란<SPAN lang=EN-US>(</SPAN>키타이<SPAN lang=EN-US>)</SPAN>은 언어도 몽골과 비슷한 유목민으로서 웬만하면 중국어<SPAN lang=EN-US>, </SPAN>여진어 등<SPAN lang=EN-US>, </SPAN>여러 나라 말을 할 줄 아는 선배였다<SPAN lang=EN-US>. 그들은 </SPAN>테무진과 그의 몽골군의 미래가 불투명할 때부터 테무진을 따랐다<SPAN lang=EN-US>. </SPAN>몽골의 여러 부족들을 통합하고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들을 하나의 군주권 아래로 편입시켜 조직화와 내정정비를 일단 끝낸 <SPAN lang=EN-US>1206</SPAN>년에 징기즈칸은 대외전쟁에 나섰다<SPAN lang=EN-US>. </SPAN>그렇지 않으면 주변국가로부터 와해공작이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었다<SPAN lang=EN-US>. 더군다나</SPAN> 그의 군대는 피복속 부족민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므로 그들을 무조건 신임할 수도 없었다<SPAN lang=EN-US>. </SPAN>그들이 원래의 거주지에 머물러 있는 한 그만큼 더 위험하였다<SPAN lang=EN-US>. </SPAN>대외전쟁으로 유목민들의 전리품 획득의 기대에 부응하고 아울러 이제 막 통합된 국내를 전시체제로 완전히 통솔<SPAN lang=EN-US>, </SPAN>장악을 계속할 수 있어야 했다<SPAN lang=EN-US>. </SPAN>더구나 그 동안 끊임없는 전쟁과 기후변화로 가축의 수가 격감되어 몽골고원의 목축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받고 있었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그는 금나라를 공격하기 앞서 중국의 영하<SPAN lang=EN-US>, </SPAN>감숙<SPAN lang=EN-US>, </SPAN>오르도스<SPAN lang=EN-US>, </SPAN>신강 자치구 일부지역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던 탕구트(서하)를 공격하였다<SPAN lang=EN-US>. </SPAN>탕구트의 북쪽 경계는 고비사막의 남부에서 오아시스 도시인 하미에 이르기까지 몽골족이 살던 지역을 따라 그어져 있었다<SPAN lang=EN-US>. </SPAN>티베트계인 탕구트족은 그들의 지배를 받는 한족과 위그르족 등과 함께 서요를 구성하였으므로<SPAN lang=EN-US>, </SPAN>한족의 정착성향과 위그르의 유목기질이 절충된 사회구조를 유지하였다<SPAN lang=EN-US>. </SPAN>그동안 탕구트는 사막과 초원<SPAN lang=EN-US>, </SPAN>그리고 농경지역을 바탕으로 요<SPAN lang=EN-US>, </SPAN>송<SPAN lang=EN-US>, </SPAN>금 사이에서 독특한 문화를 꽃피우며 발전해 왔고, 경계를 길게 맞댄 막북의 몽골과는 뚜렷한 충돌은 없었다<SPAN lang=EN-US>. </SPAN>그들은 수많은 가축을 쳤고 동서 교역로의 동쪽 끝에 위치하여 국가 재정의 대부분은 교역상의 이득 및 상거래에 부과되는 세에 의존하였다<SPAN lang=EN-US>. </SPAN>탕구트는 중국의 서북방에 있어서 유목민들이 공략하기 힘든 견고한 성곽도시들을 가지고 있었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징기즈칸은 내부적으로 제국의 기본틀을 조직화하면서 이 탕구트왕국(서하)을<SPAN lang=EN-US> 1205</SPAN>년<SPAN lang=EN-US>, 1207</SPAN>년<SPAN lang=EN-US>, 1209</SPAN>년의 세 차례에 걸쳐 침입하였다<SPAN lang=EN-US>. </SPAN>쿠릴타이가 열리기 전인<SPAN lang=EN-US> 1205</SPAN>년 야율아해 지휘하의 몽골군이 탕구트 영토를 처음으로 공격하여 낙타를 비롯한 많은 가축을 빼앗아 돌아왔다<SPAN lang=EN-US>. </SPAN>두 번째는<SPAN lang=EN-US> 1207</SPAN>년 가을로서 그들은 올로하이를 함락하여 많은 말<SPAN lang=EN-US>, </SPAN>낙타<SPAN lang=EN-US>, </SPAN>재물 등을 약탈하고 그곳의 직업적 기술자나 농민들을 잡아 유목지대로 강제 이주시켰다<SPAN lang=EN-US>. </SPAN>이들은 탕구트가 군사를 규합하자<SPAN lang=EN-US> 1208</SPAN>년 초여름의 더위를 피하여 되돌아왔다<SPAN lang=EN-US>. </SPAN>이 두 번의 공격은 아직 본격적인 정복전쟁이라기보다는 약탈 정보전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SPAN lang=EN-US>. </SPAN>당시 서방에는 서요나 호라즘샤가 버티고 있고 남쪽에는 몽골족의 발전을 막아온 동아시아 제<SPAN lang=EN-US>1</SPAN>의 강국 금나라가 있었다<SPAN lang=EN-US>. </SPAN>몽골국이 웅비하려면 이들과의 결전을 피할 수 없었고 이를 위해 탕구트를 제편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했다<SPAN lang=EN-US>. </SPAN>또 탕구트의 좋은 말과 낙타<SPAN lang=EN-US>, </SPAN>이름 높은 활과 검<SPAN lang=EN-US>, </SPAN>갑주 역시 탕구트의 기병만큼 몽골에 필요했다<SPAN lang=EN-US>. </SPAN>탕구트를 손에 넣으면 비단길을 통한 동서교역의 이익을 나눌 수 있었고<SPAN lang=EN-US>, </SPAN>무엇보다 중원과 서역으로 진출하는 안전한 통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SPAN lang=EN-US>. </SPAN>두 번에 걸쳐 탕구트의 허실을 탐색한 몽골군은<SPAN lang=EN-US> 1209</SPAN>년<SPAN lang=EN-US> 4</SPAN>월 후방공격을 차단하고 금나라에 대한 원정로를 확보하는데 목적을 두고 탕구트를 침략하였다<SPAN lang=EN-US>. 징</SPAN>기즈칸은 중국을 나누고있는 세 나라 가운데 가장 약한 이웃인 탕구트를 공격하여 정착민에 대한 몽골군의 전투력을 시험하였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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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 lang=EN-US><o: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B style="mso-bidi-font-weight: 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샤먼(무당)에 대한 군주권의 우위 확보<BR><BR><SPAN lang=EN-US><?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SPAN></SPAN></B></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몽골인들의 세계에서 샤먼<SPAN lang=EN-US>(</SPAN>무당<SPAN lang=EN-US>)</SPAN>의 권위는 부족 수령들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자리였다<SPAN lang=EN-US>. </SPAN>몽골인들은 중요한 문제를 그들과 상의하고 그들의 충고를 따랐다<SPAN lang=EN-US>. </SPAN>그들이 퍼뜨리는 이야기는 부족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SPAN lang=EN-US>. </SPAN>그 당시 몽릭의 아들 코코추가 샤먼으로 대단한 권위를 행사하였는데 평민들은 그가 백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영혼과 대화한다고 믿었다<SPAN lang=EN-US>. </SPAN>언젠가 그는 몽골고원에 흔히 찾아오는 매서운 추위에 벌거벗은 몸으로 황야와 산 속을 헤매다가 돌아와<SPAN lang=EN-US> “</SPAN>하늘이 나에게 말하기를 땅위의 모든 것을 테무진과 그의 자식들에게 주었으며 그를 징기즈칸이라 부르라<SPAN lang=EN-US>”</SPAN>고 하였다고 하였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은 그러한 이야기가 샤머니즘적인 몽골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리라 생각하고 코코추를 신임하였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코코추의 아버지인 몽릭은 과부인 징기즈칸의 어머니 호엘룬 에케와 내연의 관계에 있었다<SPAN lang=EN-US>. </SPAN>코코추는 자신의 주술능력과 자기 아버지의 위치로 자신을 신성불가침의 존재로 여겼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이 시행한<SPAN lang=EN-US> 1206</SPAN>년의 여러 조치에 많은 사람들이 불만을 품고 코코추의 주변에 모이기 시작하자 그는 초자연적인 자신의 권위를 이용하여 권력을 장악하려 하였다<SPAN lang=EN-US>. </SPAN>그는 우선 징기즈칸의 집안에 불화를 일으켰다<SPAN lang=EN-US>. </SPAN>그는 조치 카사르에 대한 징기즈칸의 의심을 부추겨 조치 카사르를 치게 함으로써 칸의 권위에 손상을 주려 하였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징기즈칸과 카사르와의 불화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은 그를 의심할 만하였다<SPAN lang=EN-US>. </SPAN>일찍이 바야우트씨족 출신의 사람이 초원의 왕자가 될 만한 후보자로 사차 베키<SPAN lang=EN-US>, </SPAN>자무카<SPAN lang=EN-US>, </SPAN>그리고 타타르족의 알락 위드르 외에 카사르도 꼽았었다<SPAN lang=EN-US>. </SPAN>케레이트의 토오릴과 싸울때도 카사르는 자기 처자식을 토오릴에게 남겨두었었다<SPAN lang=EN-US>. </SPAN>또 카사르는 여러 번 형의 뜻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였다<SPAN lang=EN-US>. </SPAN>콩기라트족이 화친하려 왔을 때 카사르가 그들을 덮치는 바람에 그들이 자무카와 연합하게 된 일도 있었으며 타타르와 싸운 후 징기즈칸은 포로<SPAN lang=EN-US> 1</SPAN>천명을 모두 죽이라고 하였음에도 그는 자기 타타르족 부인의 말대로 일부를 살려주었었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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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독자적으로 전략을 구사하면서 상대방 군대를 혼란에 빠뜨린 후 힘을 모아 생각지도 못한 반격을 가하는 끈질긴 투지가 몽골군에게는 몸에 배여 있었다<SPAN lang=EN-US>. </SPAN>또 싸우기 전 척후대를 보내 지형과 정세를 사전에 확보하여 일사분란한 작전을 펼치는 치밀함이 있었다<SPAN lang=EN-US>. </SPAN>또 몽골군은 일주일 동안 먹지도 않고<SPAN lang=EN-US>, </SPAN>자지도 않고<SPAN lang=EN-US>, </SPAN>쉬지도 않고 말을 달려 적을 분쇄하기도 하였다<SPAN lang=EN-US>. 1206</SPAN>년 징기즈칸의 즉위 후 군사훈련 중에는<SPAN lang=EN-US> 6</SPAN>일간의 고비사막의 강행군이 들어 있었다<SPAN lang=EN-US>. </SPAN>행군 동안 모든 음식물들이 거두어 들여졌고 다만 물만이 배급되었다<SPAN lang=EN-US>. </SPAN>휴식은 첫날에는<SPAN lang=EN-US> 6</SPAN>시간<SPAN lang=EN-US>, </SPAN>둘째 날에는<SPAN lang=EN-US> 5</SPAN>시간, 이런 식으로 줄여져<SPAN lang=EN-US> 6</SPAN>일째에는<SPAN lang=EN-US> 1</SPAN>시간으로 되었다<SPAN lang=EN-US>. 7</SPAN>일째에는 하루종일 공격과 포위훈련이 열렸고, 그리고 이를 견딘 자들만 천호대에 배속시켰다<SPAN lang=EN-US>. 이</SPAN>들은 적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다른 군사에게는 공손하여 부대의 핵심이 되었다<SPAN lang=EN-US>. </SPAN>몽골군의 독특한 점은 단순히 개인의 용맹이나 기교에 의존하기 보다 대규모 작전을 전령을 사용하거나 특별한 신호화살을 통하여 조정할 수 있는 능력에 있었다<SPAN lang=EN-US>. 이들의 </SPAN>군사적이기 보다 논리적인 능숙함은 연례 사냥대회 같은 대규모 훈련에서 얻어졌다<SPAN lang=EN-US>. 이</SPAN>것이 때로는 일사분란한 움직임으로 때로는 끈질긴 생명력으로 이어졌다<SPAN lang=EN-US>. </SPAN></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징기즈칸은 병사들의 복지에 관심을 기울임으로서 충성심을 이끌어냈다<SPAN lang=EN-US>. </SPAN>그는 장교들에게 병사들과 같은 음식을 먹도록 하는 등 평등한 생활을 요구하였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의 생활도 병사들과 거의 같았다<SPAN lang=EN-US>. “</SPAN>나는 야만적인 북쪽출신으로 소치기와 말치기와 같은 의복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는다<SPAN lang=EN-US>. </SPAN>우리는 같이 희생하고 부를 같이 나눈다<SPAN lang=EN-US>. </SPAN>나는 이 나라를 신생아로 보고 병사들을 친형제처럼 돌본다<SPAN lang=EN-US>.” <BR><BR></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SPAN lang=EN-US></SPAN>징기즈칸의 군대는 철저하게 평등한 집단이 되었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의 지도력과 보호하에서 몽골 기마병은 유라시아 대부분을 휩쓸었으며 그 절정기에는 모든 전쟁에서 승리하였다<SPAN lang=EN-US>. </SPAN>그들 개개인도 중국이나 러시아<SPAN lang=EN-US>, </SPAN>페르시아<SPAN lang=EN-US>, </SPAN>그리고 서방 유럽이 소집한 적군에 비교하여 매우 우수하였다<SPAN lang=EN-US>. </SPAN><SPAN lang=EN-US>1204</SPAN>년 나이만족에 대한 승리에서부터<SPAN lang=EN-US> 1209</SPAN>년 탕구트에 대한 원정이 있을 때까지의 기간이 징기즈칸이 전쟁 대신 제국의 조직을 닦는 일에 몰두할 수 있었던 유일한 시간이었다<SPAN lang=EN-US>. 이</SPAN> 기간에 제국의 내적인 완성을 위한 기초와 대칸 일족의 권위가 확립되었고, 장군들에게는 전쟁 지휘권이 부여되었다<SPAN lang=EN-US>. <BR><BR><?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몽골에서는 매년 가을 소를 잡아 뼈를 발라낸 뒤 고기를 세로로 길게 자른다<SPAN lang=EN-US>. </SPAN>이 고기를<SPAN lang=EN-US> 3~4</SPAN>개월 이상 건조한 창고 등에서 바싹 말린 후 가루로 빻은 것이<SPAN lang=EN-US> </SPAN>보르츠이다<SPAN lang=EN-US>. </SPAN>소 방광 하나에 한마리 분량의 고기가루가 들어가지만 무게는<SPAN lang=EN-US> 3~4 kg</SPAN>에 불과하다<SPAN lang=EN-US>. </SPAN>몽골군은 보르츠를 가득넣은 소 방광을 한 사람에 두 개씩 휴대해 다니다가 더운물에 보르츠를 조금씩 풀어 마시면서 식사를 해결하였다<SPAN lang=EN-US>. <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천호의 재편과 천인대장의 임명 후 징기즈칸은 황금씨족에게 부민을 나누었다<SPAN lang=EN-US>. </SPAN>세 명의 아들<SPAN lang=EN-US>, </SPAN>주치<SPAN lang=EN-US>, </SPAN>차가타이<SPAN lang=EN-US>, </SPAN>오고타이에게 각각<SPAN lang=EN-US> 4</SPAN>개의 천호를 나누어주고 제국의 서방 알타이산 방면에 배치하여 우익 울루스를 만들었으며<SPAN lang=EN-US>, </SPAN>또 세 명의 친동생<SPAN lang=EN-US>, </SPAN>조치 카사르<SPAN lang=EN-US>, </SPAN>카치운<SPAN lang=EN-US>, </SPAN>테무게 옷치긴에게는 각각<SPAN lang=EN-US> 1</SPAN>개<SPAN lang=EN-US>, 3</SPAN>개<SPAN lang=EN-US>, 8</SPAN>개의 천호를 주어 고원동방의 경계인 흥안령 방면에 두어 좌익 울루스를 만들었다<SPAN lang=EN-US>. </SPAN>이 동서 여섯 왕가의 중앙에 징기즈칸과 그의 막내아들 톨루이가 있었는데 중앙의 징기즈칸 직속 천호군도 서쪽으로 보오르추<SPAN lang=EN-US>, </SPAN>동쪽으로 무칼리라는<SPAN lang=EN-US> 2</SPAN>명의 노장을 중심으로 다시 우익<SPAN lang=EN-US>, </SPAN>좌익의 형태로 나누어 배치하였다<SPAN lang=EN-US>. </SPAN>중군은 바아린의 나야아가 지휘하였으며 입양아인 탕구트인 차가안이 선발된<SPAN lang=EN-US> 천</SPAN>명을 지휘하였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결국 징기즈칸은 남쪽을 향해 가장 바깥쪽에 좌우<SPAN lang=EN-US> 3</SPAN>개씩의 일족왕가<SPAN lang=EN-US>, </SPAN>그의 안쪽에 또한 좌우의 천호군 그리고 정중앙에 징기즈칸 자신과<SPAN lang=EN-US> 4</SPAN>개의 오르도를 지키는 케식텐이 있어<SPAN lang=EN-US>, </SPAN>학이 좌우의 날개를 크게 벌린 것 같은 형태로 남쪽을 향하여 배치되었다<SPAN lang=EN-US>. </SPAN>이 대형은 왼쪽으로 중국<SPAN lang=EN-US>, </SPAN>가운데는 투르키스탄과 동부이란<SPAN lang=EN-US>, </SPAN>오른쪽으로 러시아 초원을 향했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이 사망했을 때 몽골군의 실제 병력은<SPAN lang=EN-US> 12</SPAN>만<SPAN lang=EN-US>9천</SPAN>명이었다<SPAN lang=EN-US>. </SPAN>이중 좌익에<SPAN lang=EN-US> 6</SPAN>만<SPAN lang=EN-US>2천</SPAN>명<SPAN lang=EN-US>, </SPAN>우익에<SPAN lang=EN-US> 3</SPAN>만<SPAN lang=EN-US>8천</SPAN>명이 배치되었으며<SPAN lang=EN-US>, </SPAN>나머지는 중군과 보충대였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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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이들 전투단위는 평화시에도 유지되었다<SPAN lang=EN-US>. </SPAN>모든 젊은이는 각 단위에 소속되어야 하며 동원령을 피하는 자는 사형에 처해졌다<SPAN lang=EN-US>. </SPAN>모든 남성은 평시에는 수렵의무<SPAN lang=EN-US>, </SPAN>그리고 전시에는 병역의무가 부과되었다<SPAN lang=EN-US>. 징</SPAN>기즈칸은 한 집에서 병사 한 명씩만을 차출<SPAN lang=EN-US>, </SPAN>군대를 구성했다<SPAN lang=EN-US>. </SPAN>이들 개개인은<SPAN lang=EN-US> 5</SPAN>필의 말을 갖추고 있었다<SPAN lang=EN-US>. </SPAN>전쟁에 임하여 십호에서 이탈자가 하나나 둘 이상이 생기면 전원이 사형되었다<SPAN lang=EN-US>. </SPAN>그리고 만일<SPAN lang=EN-US> 10</SPAN>명 전원이 도망친다면 백호를 이루는 나머지 집단 전부가 처형되었다<SPAN lang=EN-US>. </SPAN>마찬가지로 십호의 대원 중 한<SPAN lang=EN-US>, </SPAN>두 명 이상이 대담하게 싸우러 진격하는데 나머지 사람이 그들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들 또한 사형에 처해졌다<SPAN lang=EN-US>. </SPAN>그리고 십호 중 한<SPAN lang=EN-US>, </SPAN>두 명이 포로가 되었을 때 그들을 구하지 않을 때도 그들은 사형에 처해졌다<SPAN lang=EN-US>. </SPAN>십호를 떠나는 어떤 대원도 그리고 전장에 부상자들을 버린 어떤 십호 대원들도 사형에 처해졌다<SPAN lang=EN-US>. </SPAN>또 군기가 휘날리는데 전투를 피하는 자들도 사형에 처해졌다<SPAN lang=EN-US>. <BR><BR><?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이제 몽골군은 새로운 형태를 갖추었으며 사소한 부족간의 분쟁과 싸움은 과거의 일이 되었다<SPAN lang=EN-US>. </SPAN>친숙한 부족과 씨족의 이름은 사라지고 여기에 속하였던 사람들은 분산 배치되었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 개인의 통합 몽골국이 탄생했으며 그의 야망은 초원을 뛰어넘었다<SPAN lang=EN-US>. </SPAN>새로운 국가는 전쟁을 위해 조직되었다<SPAN lang=EN-US>. </SPAN>십진법으로 나뉘어진 징기즈칸군은 강인한 훈련을 받았으며 장비를 잘 갖추게 되었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의 군사재편으로 과거의 부족수령들은 오그라들었고 유목민들의 상시 징병으로 전통적인 생활방식은 파괴되었다<SPAN lang=EN-US>. </SPAN>이러한 전통사회의 와해로 광범위한 계층에서 불만과 저항이 싹트게 되었다<SPAN lang=EN-US>. <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징기즈칸은 자무카와의 마지막 전쟁을 준비할 때부터 그의 추종자<SPAN lang=EN-US>(</SPAN>너케르<SPAN lang=EN-US>)</SPAN>로 구성된 친위대<SPAN lang=EN-US>(</SPAN>케식텐<SPAN lang=EN-US>)</SPAN>를 창설하였었다<SPAN lang=EN-US>. 70</SPAN>명의 주간친위대와<SPAN lang=EN-US> 80</SPAN>명의 야간친위대였다<SPAN lang=EN-US>. </SPAN>수많은 부족들의 집단적 이기주의를 누르고 중앙으로 집중된 권력을 만들기 위하여 징기즈칸은 지휘관들의 자제를 케식텐에 참여시켜 친위부대의 병력을 크게 늘렸다<SPAN lang=EN-US>. </SPAN>천인대장의 아들이 친위대에 선발되면 열 명의 추종자와 아우 한 명을 같이 오게 했다<SPAN lang=EN-US>. </SPAN>또 백인대장의 아들은 추종자 다섯 명과 한 아우를<SPAN lang=EN-US>, </SPAN>십호장의 아들과 평민의 아들이 들어올 때는 세 명과 아우 한 명을 각각 동반케 하여 만 명을 채웠다<SPAN lang=EN-US>. </SPAN>주간 친위와 야간 친위에 호르친 즉 궁사들이 추가되어 야간 친위대가<SPAN lang=EN-US> 800</SPAN>에서<SPAN lang=EN-US> 1,000</SPAN>명<SPAN lang=EN-US>, </SPAN>궁사가<SPAN lang=EN-US> 400</SPAN>에서<SPAN lang=EN-US> 1,000</SPAN>명 그리고 주간 친위대는<SPAN lang=EN-US> 8,000</SPAN>명으로 되어 완전한 하나의 투멘이 되었다<SPAN lang=EN-US>. </SPAN>이후 몽골제국은<SPAN lang=EN-US> 1330</SPAN>년대까지 이를 유지하였으며<SPAN lang=EN-US>, </SPAN>병력은 경우에 따라<SPAN lang=EN-US> 1</SPAN>만<SPAN lang=EN-US>2</SPAN>천에서<SPAN lang=EN-US> 1</SPAN>만<SPAN lang=EN-US>5</SPAN>천으로 증원되었다<SPAN lang=EN-US>. <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이들은 징기즈칸 일족에게 충성을 맹세함과 동시에 각종 특권이 부여되었다<SPAN lang=EN-US>. </SPAN>케식텐의 구성원들은 정규군의 장들보다 우위에 두어졌다<SPAN lang=EN-US>. “</SPAN>외부의 천인대장들이 나의 친위병에게 싸움을 건다면 나는 천인대장들을 벌하겠다<SPAN lang=EN-US>.” </SPAN>주간친위와 궁사는 낮에 징기즈칸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고 해가 지기 직전 야간친위와 교대했다<SPAN lang=EN-US>. </SPAN>야간친위 근무는 엄격했다<SPAN lang=EN-US>. </SPAN>밤에는 야간친위를 제외하는 누구도 오르도 주위를 돌아다닐 수 없었다<SPAN lang=EN-US>. </SPAN>만약 야간친위의 허락 없이 들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목을 베게했다<SPAN lang=EN-US>. </SPAN>급한 보고가 있으면 궁궐의 북쪽에서 야간친위에게 말하도록 했다<SPAN lang=EN-US>. </SPAN>또 야간친위의 숫자는 비밀에 부쳤고 밤에는 야간친위가 전권을 행사토록 하여<SPAN lang=EN-US>, </SPAN>왕실의 안녕을 꾀했다<SPAN lang=EN-US>. <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이들은 칸의 정책조언을 하였고 쿠릴타이나 칸이 결정한 일을 집행하였다<SPAN lang=EN-US>. </SPAN>결국 각 군의 지휘자들은 두 명의 자녀와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중앙에 볼모로 보낸 셈이었으나 동시에 중앙과 이어지는 통로를 갖게 되었다<SPAN lang=EN-US>. </SPAN>또 이 조직은 군소 토후들의 전횡과 속민들의 소요를 막는 역할도 하였다<SPAN lang=EN-US>. </SPAN>이후 친위대는 수많은 장군과 대제국의 행정을 담당하는 관리들을 배출하여 몽골 정부의 중추가 되었으며 그 역할은 징기즈칸의 아들과 손자에게서도 계속되었다<SPAN lang=EN-US>. <BR><BR><o:p></o:p></SPAN></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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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SPAN style="COLOR: black"><SPAN lang=EN-US><B style="mso-bidi-font-weight: 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B><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굴림; mso-font-kerning: 0pt">예케 몽골 울루스<SPAN lang=EN-US>(</SPAN>큰 몽골 나라<SPAN lang=EN-US>)</SPAN>의 지배자 징기즈칸으로 거듭나다<BR><BR><SPAN lang=EN-US><?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SPAN></SPAN></B></P></SPAN></B>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lang=EN-US>1206</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년 봄 테무진은 부르칸칼둔 성산<SPAN lang=EN-US>(</SPAN>聖山<SPAN lang=EN-US>) </SPAN>근처 오논강 원류 강변의 초원에서 거대한 집회<SPAN lang=EN-US>(</SPAN>대쿠릴타이<SPAN lang=EN-US>)</SPAN>를 열었다<SPAN lang=EN-US>. </SPAN>황금씨족의 수호영령인 술데의 상징으로 아홉 개의 야크 꼬리를 가진 흰색 깃발 툭을 세우고 테무진은 지고의 칸<SPAN lang=EN-US>(</SPAN>카간<SPAN lang=EN-US>)</SPAN>으로 추대되었다<SPAN lang=EN-US>. </SPAN>카간은<SPAN lang=EN-US> 5</SPAN>세기 유연이 처음으로 사용한 군장의 칭호로서 몽골고원의 군주들이 이를 사용하였으나<SPAN lang=EN-US> 9</SPAN>세기 위그르의 몰락 이후 이를 사용할 만한 계승자가 없었다<SPAN lang=EN-US>. </SPAN>대샤먼인 코코추는<SPAN lang=EN-US> ‘</SPAN>영원한 푸른 하늘이 모든 몽골과 투르크인의 카간<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으로 테무진을 선택했다<SPAN lang=EN-US>’</SPAN>고 선언하였다<SPAN lang=EN-US>. </SPAN>샤머니즘에서 텡그리는 하늘을 지배하는 신이었으며 징기즈는 땅을 다스리는 신이었다<SPAN lang=EN-US>. “</SPAN>하늘에는 영원한 하늘의 신이 있고 땅에는 유일한 징기즈칸이 있다는 하늘의 소리가 있었다<SPAN lang=EN-US>. </SPAN>이 말을 말이 달릴 수 있는 곳까지<SPAN lang=EN-US>, </SPAN>배가 닿는 곳까지<SPAN lang=EN-US>, </SPAN>사자가 닿는 곳까지<SPAN lang=EN-US>, </SPAN>편지가 닿는 곳까지<SPAN lang=EN-US>, </SPAN>연락이 닿는 곳까지 들려주어라<SPAN lang=EN-US>. </SPAN>이 말을 들려주어도 따르지 않는 자는 눈이 있어도 볼 수 없게 되고<SPAN lang=EN-US>, </SPAN>손이 있어도 잡을 수 없게되고<SPAN lang=EN-US>, </SPAN>다리가 있어도 걸을 수 없게 될 것이다<SPAN lang=EN-US>. </SPAN>이것은 영원한 하늘의 명령이다<SPAN lang=EN-US>.” <BR><BR></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코코추가 징기즈칸의 권력에 종교적 권위를 주자 몽골인들은 징기즈칸이 세계정복의 천명을 받았다고 굳게 믿었다<SPAN lang=EN-US>. </SPAN>이어서 징기즈칸은 훈시를 하였다<SPAN lang=EN-US>. “</SPAN>너희들은 타타르<SPAN lang=EN-US>, </SPAN>케레이트<SPAN lang=EN-US>, </SPAN>메르키트<SPAN lang=EN-US>, </SPAN>오이라트<SPAN lang=EN-US>, </SPAN>투르크 등<SPAN lang=EN-US>, </SPAN>여러 종족에 속하였으나 오늘부터는 하나의 몽골백성이다<SPAN lang=EN-US>. </SPAN>몽골국은 몽골고원에 속한 여러 종족들이 가진 충성심과 군율로 다져질 것이다<SPAN lang=EN-US>. </SPAN>충성과 군율 이것만이 대몽골국이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위대한 비밀이 될 것이다<SPAN lang=EN-US>.” 100만명 가까운 인구에<SPAN lang=EN-US> 2000</SPAN>만 마리에 가까운 가축을 보유한 새로운 나라가 막 탄생하였다<SPAN lang=EN-US>. </SPAN>새로운 나라의 이름은 예케 몽골 울루스<SPAN lang=EN-US>(</SPAN>큰 몽골 나라<SPAN lang=EN-US>), </SPAN>통치자의 칭호는 징기즈칸<SPAN lang=EN-US>(</SPAN>成吉思汗<SPAN lang=EN-US>)</SPAN>이었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이란 <SPAN lang=EN-US>‘</SPAN>황제 중의 황제<SPAN lang=EN-US>’ </SPAN>라는 뜻이다<SPAN lang=EN-US>. <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원사<SPAN lang=EN-US>(</SPAN>元史<SPAN lang=EN-US>)</SPAN>에는<SPAN lang=EN-US> 1206</SPAN>년을 몽골제국 원년으로 삼고 있으며 징기즈칸을 태조라 기록하고 있다<SPAN lang=EN-US>. <BR><BR></SPAN></SPAN></SPAN></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이 자리에서 징기즈칸은 자신의 승리를 추종자들의 복종<SPAN lang=EN-US>, </SPAN>충성<SPAN lang=EN-US>, </SPAN>희생으로 돌리고<SPAN lang=EN-US>, </SPAN>어려웠던<SPAN lang=EN-US> 3</SPAN>년 전<SPAN lang=EN-US>, </SPAN>그와 함께 발주나호까지 물러나 생사고락을 같이 하기로 서약하였던 너케르들에게 포상을 내렸다<SPAN lang=EN-US>. </SPAN></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lang=EN-US>“</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보오르추와 무칼리는 나를 올바로 이끌고 그릇됨을 멈추도록 하여 이 자리에 이르게 하였다<SPAN lang=EN-US>. </SPAN>이제 뭇 사람의 윗자리에 앉아서 아홉 번 죄를 지어도 벌받지 않도록 할 것이다<SPAN lang=EN-US>.” </SPAN>또 나머지 장군들에게도<SPAN lang=EN-US> “</SPAN>메르키트의 땅과 셀렝가강에 원하는 대로 둔영을 치고 자자손손 활통을 매고 술잔을 비우며 다르한으로 행세하라<SPAN lang=EN-US>. </SPAN>너희들이 어떠한 잘못을 하여도 처벌하지 않겠다<SPAN lang=EN-US>. </SPAN>너희들이 바라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SPAN lang=EN-US>, </SPAN>아무에게나 시켜라<SPAN lang=EN-US>. </SPAN>너희는 직접 내게 생각한 바를 말하고 부족한 것을 말하라<SPAN lang=EN-US>. </SPAN>약탈물과 전리품을 마음대로 취하며<SPAN lang=EN-US>, </SPAN>짐승도 잡는 대로 가져라<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은 가족들<SPAN lang=EN-US>, </SPAN>즉 황금씨족 사람들에게도 당연히 보상을 주었다<SPAN lang=EN-US>. </SPAN>먼저 어머니 호엘룬과 막내동생 테무게 옷치긴에게<SPAN lang=EN-US> 1</SPAN>만명을 주었다<SPAN lang=EN-US>. </SPAN>양자 시기 쿠두쿠에게는<SPAN lang=EN-US> “</SPAN>모든 사람의 몫을 나누는 것과 재판을 하는 것을 푸른 글씨로 흰 종이에 기록하여 관리하라<SPAN lang=EN-US>”</SPAN>고 하였다<SPAN lang=EN-US>. </SPAN>이렇게 기록된 법률은 후에 야사로 알려진 법전의 기초가 되었다<SPAN lang=EN-US>. </SPAN>또 벨구테이에게는<SPAN lang=EN-US> “</SPAN>모든 백성들에 대해서 도적을 징계하고 거짓을 자백시켜<SPAN lang=EN-US>, </SPAN>사형에 처할 만한 것은 사형시키고<SPAN lang=EN-US>, </SPAN>처벌할 만한 것은 처벌하라<SPAN lang=EN-US>”</SPAN>고 하였다<SPAN lang=EN-US>. </SPAN>또한 그의 친척들과 동료들에게 수 천명씩의 유목민들을 분배하였다<SPAN lang=EN-US>. <BR><BR><o:p></o:p></SPAN></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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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B style="mso-bidi-font-weight: 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징기즈칸 어록<BR><BR></SPAN></B><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lang=EN-US><?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lang=EN-US>- </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SPAN lang=EN-US>. </SPAN>나는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쫓겨났다<SPAN lang=EN-US>. <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lang=EN-US>- </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SPAN lang=EN-US>. </SPAN>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SPAN lang=EN-US>, </SPAN>목숨을 건 전쟁이 내 직업이고 내 일이었다<SPAN lang=EN-US>. <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lang=EN-US><BR>- </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지 말라<SPAN lang=EN-US>. </SPAN>그림자 말고는 친구도 없고 병사로만<SPAN lang=EN-US> 10</SPAN>만<SPAN lang=EN-US>, </SPAN>백성은 어린애 노인까지 합쳐<SPAN lang=EN-US> 2</SPAN>백만도 되지 않았다<SPAN lang=EN-US>.<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lang=EN-US><BR>- </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배운 게 없다고 힘이 없다고 탓하지 말라<SPAN lang=EN-US>. </SPAN>나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으나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SPAN lang=EN-US>.<o:p></o:p></SPAN></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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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결국 타양 칸은 정면대결로 결심 후 타밀강을 내려가 오르콘강을 건너고 나쿠절벽의 동쪽자락을 통과하여 차키르 마우트에 도착하였다<SPAN lang=EN-US>. </SPAN>나이만측은 톡토아 베키 지휘의 메르키트<SPAN lang=EN-US>, </SPAN>자무카 지휘의 자다라트<SPAN lang=EN-US>, </SPAN>그리고 되르벤<SPAN lang=EN-US>, </SPAN>타타르<SPAN lang=EN-US>, </SPAN>카다긴<SPAN lang=EN-US>, </SPAN>살지우트 등이 가담하여 압도적 우위에 있었다<SPAN lang=EN-US>. </SPAN>타양 칸은 이들과 함께 알타이에서 항가이로 진군하였다<SPAN lang=EN-US>. </SPAN>차키르 마우트에서 일시 접전을 벌였던 양군은 전장을 나코산으로 옮겨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SPAN lang=EN-US>. </SPAN>테무진은 스스로 선봉이 되어 전군에 명령을 내렸다<SPAN lang=EN-US>. “</SPAN>풀숲과 같이 넓게 진격하라<SPAN lang=EN-US>. </SPAN>호수와 같이 넓은 진을 펴고 끌과 같이 날카롭게 싸우라<SPAN lang=EN-US>.” </SPAN>나이만군은 압도당했다<SPAN lang=EN-US>. </SPAN>겁이난 타양 칸은 물러나서 산 정상에 진을 쳤다<SPAN lang=EN-US>. </SPAN>몽골군은 산을 포위하였다<SPAN lang=EN-US>. </SPAN>격렬하고 끔찍한 전투였다<SPAN lang=EN-US>.<BR><BR><?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SPAN lang=EN-US>“</SPAN>늑대들이 가축의 무리를 쫓듯이 우리를 쫓는 저 자들은 누구인가<SPAN lang=EN-US>?”</SPAN>라고 <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타양이<SPAN lang=EN-US> </SPAN></SPAN>묻자 <SPAN lang=EN-US>자무카가 대꾸하였다<SPAN lang=EN-US>.</SPAN> “</SPAN>저들은 내 형제 테무진의 네 마리 사냥개<SPAN lang=EN-US>(</SPAN>사구<SPAN lang=EN-US>)</SPAN>이다<SPAN lang=EN-US>. </SPAN>저들은 사람의 고기를 먹여 기르며<SPAN lang=EN-US>, </SPAN>쇠사슬로 묶여있다<SPAN lang=EN-US>. </SPAN>저들의 두개골은 놋쇠로 만들었으며<SPAN lang=EN-US>, </SPAN>이빨은 바위를 잘라 만들었고<SPAN lang=EN-US>, </SPAN>혀는 칼과 같으며<SPAN lang=EN-US>, </SPAN>심장은 쇠로 만들었다<SPAN lang=EN-US>. </SPAN>저들은 채찍 대신 굽은 군도를 가졌다<SPAN lang=EN-US>. </SPAN>저들은 갈증을 이슬로 달래며 바람과 함께 질주한다<SPAN lang=EN-US>. </SPAN>그들은 전투에서 사람 고기를 먹는다<SPAN lang=EN-US>. </SPAN>이제 저들은 사슬에서 풀렸으며<SPAN lang=EN-US>, </SPAN>턱에는 군침이 흐르고 기뻐 날뛰고 있다<SPAN lang=EN-US>. </SPAN>이 네마리 사냥개는 제베<SPAN lang=EN-US>, </SPAN>쿠빌라이<SPAN lang=EN-US>, </SPAN>젤메<SPAN lang=EN-US>, </SPAN>수베테이다.<SPAN lang=EN-US>” </SPAN>그러자 타양이 다시 물었다<SPAN lang=EN-US>. “</SPAN>저 후방에서 굶주린 매처럼 급하게 달려드는 자는 누구인가<SPAN lang=EN-US>?” </SPAN>자무카가 대답하였다.<SPAN lang=EN-US> “</SPAN>그는 나의 안다 테무진이며 쇠갑옷을 입고 있다<SPAN lang=EN-US>. </SPAN>당신은 몽골군이 오면 양을 먹어치우듯 고깃 조각 하나 남김없이 먹어치우겠다고 하지 않았는가<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밤이 되었다<SPAN lang=EN-US>. </SPAN>승자는 몽골군이었다<SPAN lang=EN-US>. </SPAN>타양 칸은 중상을 입고 부하들에 의해 산 위로 운반되었다<SPAN lang=EN-US>. </SPAN>그는 죽어가고 있었다<SPAN lang=EN-US>. </SPAN>코리 수베치가 울부짖었으나 소용이 없었다<SPAN lang=EN-US>. 코리 수베치</SPAN>는 그의 부하들을 이끌고 산을 내려와 항복을 거부하고 죽을 때까지 싸웠다<SPAN lang=EN-US>. </SPAN>테무진은<SPAN lang=EN-US> “</SPAN>이런 부하들이 있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SPAN lang=EN-US>”</SPAN>라고 놀라워하였다<SPAN lang=EN-US>. </SPAN>나이만의 패잔병들은 밤중에 공격을 피하려 가파른 산위로 오르다가 계속 굴러 떨어져 뼈와 머리가 으깨지고 썩은 나무처럼 쌓였다<SPAN lang=EN-US>. </SPAN>타양의 아들 쿠출루크는 이르티쉬로 도망쳤다<SPAN lang=EN-US>. </SPAN>이렇게 적은 수의 도망자를 제외한 대다수의 나이만 병사들은 테무진에게 항복하였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자무카는 양측이 접전을 벌이기 직전<SPAN lang=EN-US>, </SPAN>테무진의 새로운 전투대형을 보고 나이만족이 승리하지 못하리라 판단하고 전쟁터에서 빠져 나왔다<SPAN lang=EN-US>. </SPAN>나이만족과 몽골족 간에 인종적 종교적 차이가 너무나 현격하여 자무카 휘하의 병사들은 나이만족 편에서 싸울 뜻이 없었다<SPAN lang=EN-US>. </SPAN>자무카는 몽골족의 적이었던 나이만과 연합함으로써 민족을 배신한 셈이었다<SPAN lang=EN-US>. </SPAN>동나이만이 붕괴하자 타양 칸에 가담했던 반테무진계 몽골씨족들은 대부분 테무진에게 투항하였다<SPAN lang=EN-US>. </SPAN>나이만 패망 후 타양 칸의 금인 보관자인 위구르 사람 타타통가는 포로가 되어 테무진을 위하여 봉사하게 되었다<SPAN lang=EN-US>. </SPAN>그리하여 위구르인 관리들로 이루어진 몽골 사무원의 싹이 트게 되었다<SPAN lang=EN-US>. </SPAN>이제 전 몽골고원이 평정되었다<SPAN lang=EN-US>. </SPAN>아홉개의 야크 꼬리털로 만들어진 테무진의 군기는 모든 투르크 몽골 사람들의 깃발이 되었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알타이산맥 남쪽에서 나이만군은 패배했고 나이만의 연합부족들도 항복했으나 메르키트만은 도망쳤기에<SPAN lang=EN-US>, 1204</SPAN>년 가을 테무진은 톡토아 베키가 이끄는 오도이트 메르키트를 공격하여 격파하고 계속 이들을 추격하였다. 이로써 메르키트부는 사실상 해체되었다<SPAN lang=EN-US>. </SPAN>메르키트부의 한 세력이었던 다일 우순의 오아스 메르키트족은 스스로 귀순하여 아름다운 딸 쿨란을 테무진에게 바쳤다<SPAN lang=EN-US>. </SPAN>이후 타양의 동생이며 서나이만의 칸인 부이룩은 이르티쉬 상류지방 즉 시베리아 알타이<SPAN lang=EN-US>, </SPAN>타르바가타이<SPAN lang=EN-US>, 징</SPAN>기즈로 형성된 산지 근처에서 쿠출루크<SPAN lang=EN-US>, </SPAN>톡토아 베키<SPAN lang=EN-US>, </SPAN>자무카와 함께 저항을 계속하였지만<SPAN lang=EN-US>, </SPAN>그는 테무진의 특수부대에 의해 기습 살해되었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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