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징기즈칸(Genghis Khan, 成吉思汗)과 몽골제국(蒙古帝國) - 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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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관리자 |
2011.03.08 09:28:02, 조회 1,8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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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1년은 금나라에게 악몽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였다. 1212년 가을 몽골군은 다시 돌아와 공세를 취하였다. 이번에도 몽골은 많은 지역을 다시 석권하고 중도 다음으로 금에게 중요한 산서 북부의 서경(대동)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징기즈칸이 화살에 맞았기 때문에 포위를 풀고 북쪽으로 퇴각하였다. 서경은 다시 금나라에게 돌아갔다. 몽골은 이러한 고전을 통하여 공성기법의 전문성과 공성공병 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 문제는 결국 금나라에 적대적인 한족들을 징발하여 해결하였다.
1213년 가을 세 번째의 몽골 침략은 가공할 만하였다. 징기즈칸은 앞서 두 번의 경험을 바탕으로 일대 공세를 펴 결정적인 승리를 차지하였다. 야호령을 넘어 거침없이 진격하던 몽골군은 전과 달리 거용관 북구에서 진격을 멈췄다. 금나라군이 거용관에 철제 관문을 달아 대비하고 있었다. 먼저 제베는 중앙 전위부대를 이끌고 거용관 관문 입구를 향해 쳐들어가는 척 하다가 곧 자기 휘하부대를 이끌고 허겁지겁 퇴각하였다. 금나라 병사들은 그가 정말로 퇴각하는 줄 알고 추격해왔다. 유도작전을 위한 위장된 퇴각이었다. 제베는 적의 추격에 걸릴 듯 걸릴 듯하며 추격해오는 적을 멀리까지 유인해 갔다. 그들은 이렇듯 계략이 있는 줄도 모르고 깊숙히 추격해 갔다. 이때 퇴각하던 제베의 전위대가 갑자기 반격을 시작했다. 그 뒤쪽에는 징기즈칸이 직접 지휘하는 중앙군의 본대가 돌격해 왔다. 적의 시체는 나무토막처럼 쌓였다.
적을 완전히 소탕한 몽골군은 회래에서 거용관에 이르는 길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즉 7, 8월에 걸쳐 광활한 일대를 지키는 요새도시, 화산으로 둘러싸여 노란 바람이 부는 선화를 점령하였고, 여기서 다시 톨루이를 공격선발대로 삼아 남동쪽으로 요새화된 보안을 크게 쳐부쉈다. 이로서 장가구와 북경을 연결하는 길이 장악되면서 승리의 전기가 마련되었다. 몽골군은 장가구 근처의 선덕부와 부주를 손에 넣었고, 위녕성의 방위를 지휘하던 유백림도 투항하였다. 몽골은 선덕에서의 승리를 시초로, 덕흥을 부수고 거용관의 북쪽입구에 육박하였다. 금나라는 협상을 위해 징기즈칸을 알고 있던 거란인 석말령안을 보냈으나 그는 몽골측으로 돌아서 버렸다.
거용관에는 인적도 드물고 대낮에도 어두운 22km의 산길이 뻗어 있었고, 양편에는 험준한 절벽인 천연적인 요새에 인공적인 성곽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적이 쳐들어 오기 전에 금나라는 이 장성의 하단문을 철제로 바꾸었고 지면에 장해물을 설치하였으며, 그리고 정예부대로 방위를 세웠다. 당시 금나라는 12만 정도의 여진족 기병과 약 45만의 한족 보병으로 구성된 60만 대군을 보유하였고, 몽골 침공군의 병력은 다른 부족의 지원병 약 1만을 포함하여 6만5천명 정도였다. 몽골병사는 그곳에서 제지되었다. 징기즈칸은 거용관의 견고함을 보고 작전을 변경하였다. 즉 한 부대로 감시시키면서 자신들은 대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돌아 비호령을 넘어 자형구(역주)를 쳤다. 이후 징기즈칸은 제베에게 명하여 경무장한 소부대를 이끌고 거용관 남구의 금군 본영을 기습케 하여, 남북 양쪽에서 협격토록 함으로써 거용관을 함락시켰다. 징기즈칸은 탁주로 내려왔다. 징기즈칸은 탁주를 취한 후 바로 중도로 진격하지 않고 군사를 세 방면으로 나누어 진격시켰다. 주치, 차가타이, 오고타이의 세아들은 우익군, 동생 카사르와 테무게 옷치긴은 좌익군, 칸 자신은 막내아들 톨루이와 함께 중군을 지휘하였다.
몽골의 우익군은 보정에서 태행산맥을 따라 하북성을 남하하였다. 이들은 하남성 북쪽에서 황하에 부딪치자 태행산맥의 남단을 서쪽으로 돌아 산서성으로 나왔다. 그러면서 이들은 그 근처 도시를 하나 하나 점령하였다. 이후 금나라의 중요한 거점인 고북고와 대동 등을 점령하였다. 대동은 만리장성이 두 줄로 되는 해발 1300m 지점에 있는 성곽으로 산서성을 지키는 요지였다. 이 도시는 옛부터 난공불락이었으나 몽골인 특유의 병법에 의해 무너졌다. 몽골 우익군은 산서 중부를 돌파하여 태원과 평양을 빼앗았으나, 약탈물을 북으로 가져가기 위하여 다시 철수하였다.
중군은 전투에 깊이 개입하지 않고 화북평원의 입구인 용호대에 진을 쳤다. 그들의 진지 앞에는 북경에서 남경까지 800km 이상의 넓은 경작지가 망망대해처럼 펼쳐지고 전방 약 30km쯤 되는 곳에는 궁전과 탑들이 바라다 보였다. 중도는 당시 거대한 금나라의 수도로서 길이 43km에 이르는 성벽과 해자로 둘러쳐져 있었다. 이곳에서 금나라 군사 60만이 몽골군 7만5천과 대치하였다. 몽골의 중군은 중도를 공격하지 않았다. 중도는 너무나도 견고한 성곽도시였으므로 이것을 쳐부술만한 장비가 그들에게는 없었다. 징기즈칸은 사실을 냉정하게 파악하고는 그저 포위한 채 막사를 치고 소수병력만 남긴 채 주력인 기병을 남쪽으로 향하게 하였다. 일종의 위장전술이었다. 이 작전은 도시나 성, 하나 하나를 공격하지 않고 몇 갈래로 나뉘어 질풍과 같이 휩쓸고 곧 다음의 지방으로 사라지는 약탈이었다. 화북의 대평야로 진격해 간 몽골기병들은 끝없는 논밭에 경작된 곡식을 짓밟고 불을 질러 태워 없애 버렸다. 그뿐만 아니라 논밭 주위에 늘어서 있는 모든 농가도 불살라 버렸다. 중도 남서쪽의 보정으로부터 하남성의 북쪽에 이르는 500km 이상의 평원을 완전히 유린해 버렸다. 징기즈칸은 하북과 산동 평원을 가로 질러 하간을 취하고 제남을 함락시켰다.
성곽도시 공략에서 그들은 자기들이 잡은 포로 또는 백성들을 선봉대 앞에 세워 돌격하는 수법을 썼다. 종대로 돌격해 들어오는 몽골군 앞에 내세워진 자기들 군사와 백성에 대하여 차마 무기를 들 수가 없어 대부분의 성곽이나 도시가 모두 함락되었다. 이들 기병의 유린에 견딜 수 있었던 곳은 고작 하북의 진정과 대명을 비롯한 몇 안되는 요새화된 도시뿐이었다. 몽골군은 산동성의 남쪽 끝인 북위 35도선까지 침략하였다. 황하에 부딪쳐 기병만 가지고서는 해협과 같은 넓은 강을 건널 수 없어 그 정도에서 끝난 것이었다. 결과로 금나라의 수도인 중도는 고립되었다.
몽골의 좌익군은 발해만을 따라 영평과 요서의 문턱으로 향하여 산해관에서 내륙쪽 여진족의 발상지인 만주북부 즉 흑룡강 및 송화강 일대를 평정하였다.
징기즈칸은 막대한 전리품을 획득하고 만리장성쪽으로 돌아갔다. 이들 몽골군의 뒤에는 금은보화를 비롯한 고급 견직물을 실은 수레가 따랐으며, 말과 가축의 떼 그리고 수만 수천의 소년 소녀가 쇠사슬에 묶인 채 끌려갔다.
이렇듯 징기즈칸이 크게 승리하자 금나라에서는 자체 내부에서 붕괴할 징조가 나타났다. 송과의 전쟁에서 능력을 발휘하였던 여진족 장군 호사호가 북방 변경군의 지휘를 맡게되었는데, 1213년 8월 그는 비밀리에 금나라 수도로 돌아와 궁정반란을 일으켜 영제를 암살하였다. 그는 몽골군이 중도를 압박하고 있는 사이 영제의 조카 오도보를 황제로 추대하였다. 금나라의 혼란을 틈타 징기즈칸은 그해 가을 중도로 쳐들어갈 기세를 보였다. 이때 패전장군 술호고기가 도망하여 중도로 돌아왔으나 호사호에 의해 처형될 것을 두려워하여 그를 죽이고 그가 위소왕을 살해했다고 폭로하였다. 오도보는 술호고기의 패전을 용서하고 좌부원수로 다시 세우고 이어서 평장정사(재상)에 임명하였다.
화북과 요동 각지를 공격해 중도를 고립시킨 다음 1214년초 징기즈칸은 몽골 좌익군과 우익군을 합류시켜 중도 북쪽 교외에 둔영을 치고 중도 봉쇄작전에 들어갔다. 징기즈칸의 막료들이나 병사들은 곧장 돌격해 들어갈 것을 바랬으나 징기즈칸에게는 뾰족한 공성수단이 없었다. 금나라의 치열한 반격으로 포위기간이 길어지자 몽골군은 식량이 동이나 굶주리게 되었고 질병이 만연하기 시작하였다. 징기즈칸은 부족몰살에 가까운 참담한 정황을 침착하게 감추며 화친과 타협을 모색하였다.
징기즈칸은 “그대가 갖고 있던 산동과 하북의 군현들은 이미 모두 나의 땅이 되었다. 이제 그대는 오직 대도만을 붙들고 있다. 하늘이 마침내 그대를 쇠약하게 하시거늘, 나마저 그대를 궁지로 몰아버린다면 하늘이 무어라 하겠는가? 나, 이제 그만 군사를 거두려 하니, 그대는 우리 병사에게 먹을 것을 주어 우리 장수들의 분노를 달래줄 수는 없는가” 하였다. 금나라의 평장정사 술호고기는 “들으니 적의 병사도 말도 피로하다고 합니다. 이때를 타서 결전합시다”라고 하였지만 도원수(군사령관) 완안복흥은 “우리 군의 병사는 너무 급히 모아서 군인정신이 없습니다. 병사는 수도에서 군무에 응하나 가족들이 시골에 있어 신경이 모두 그쪽에 가 있습니다. 싸워서 진다면 새나 짐승과 같이 흩어져 도망합니다. 운이 좋아 이긴다고 해도 처자의 곳으로 가려고 할 것입니다. 누가 나라를 지킬 수 있습니까. 이래서는 결전을 할 수 없습니다. 숙고하여 사자를 보내어 강화하는 것이 좋습니다. 적군이 물러가면 뒤의 일을 다시 생각합시다”라고 하였다. 사나운 적의 대군을 눈앞에 두고 있는 황제 오도보로서는 그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금나라는 몽골에게 공물로 위소왕의 딸, 기국공주와 그녀를 지키기 위한 장정 십인, 졸개 백인, 동남동녀 5백인을 붙여왔으며 비단옷 3천벌, 말 3천마리를 보내왔다. 몽골군은 군사를 되돌리고 완안복흥은 그들을 거용관 밖까지 전송하였다. 정복자는 전리품을 갖고 장가구 지방을 거쳐 내몽골 초원으로 돌아갔다. 징기즈칸의 계획은 금나라의 전멸이 아니고 군사상의 위협을 없앰과 동시에 경제상의 지원을 약속시키는 정도였다. 이 공물은 이후 매년 세폐로서 보내게 되었다. 이로서 금나라는 군사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쇠퇴하였다.
몽골군사들이 선물을 받고 만리장성을 넘어 돌아가자, 금나라 황제는 비로소 안도하였다. 우선은 그들의 말발굽 아래 짓밟히는 일을 모면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언제 다시 그들이 만리장성을 넘어올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몽골군이 떠나자마자 금나라 황제는 중도(연경)가 유라시아 초원과 너무 가까워 취약하다고 생각하여 수도를 개봉으로 옮기기로 하였다. 그러니까 휴전을 성립시킨 2달 후인 6월 그는 중도를 버리고 황하로 가로막혀 있는 하남성의 개봉으로 서울을 옮김으로서 천연의 요새인 황하에 의지한 셈이었다. 중도에 남아 지휘하는 자는 완안복흥과 석말진충이었다. 완안복흥은 승상과 도원수를 겸하고 정치, 군사의 최고책임자였으나 군사면은 이전에 서경을 몽골의 맹공에서 지켜낸 석말진충에게 일임하였다. 그는 평장정사(재상), 좌부원수란 직함을 가졌다.
천도가 금나라의 마지막 같은 인상을 주자 금나라의 무골들은 집단항명을 하였다. 오도보의 행렬이 중도 남쪽부근의 양향에 도착하였을 때 수행하던 금나라 군대 중 거란족-여진족의 군사들이 그를 버리고 몽골편에 붙어버렸다. 이들은 중도를 공격하면서 그와 함께 징기즈칸에게 원군을 요청하며 집단 투항하였다.
출처 : 석조건물 문화유산탐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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