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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징기즈칸(Genghis Khan, 成吉思汗)과 몽골제국(蒙古帝國) - 32
 작성자 : 관리자 2011.03.08 09:29:28, 조회 2,070 

금나라의 천도는 두 마음이 있다는 증거였다. 징기즈칸은 노하여 1214년 가을 사무카와 석말명안의 총 지휘하에 행동을 개시하였다. 완안복흥은 개봉에 위급을 고하였다. 몽골군의 진군이 알려지자 많은 성밖의 사람들이 성안으로 피난하였다. 몽골의 전위 특수부대원들은 중국인 농부로 가장한 후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밤낮없이 달려왔다. 말들이 달리다 지쳐 쓰러지자 마지막에는 걸어서 중도로 들어가는 피난민 대열에 섞여 성문 앞에 도달하였다. 이들은 성문 앞에서 삼엄한 조사를 무사히 통과하였다. 군량을 가지고 오던 금나라의 증원군이 중도와 하간 사이의 패주에서 몽골군의 습격으로 격파되어 흩어지자 피난민으로 북새통을 이룬 중도는 식량이 동이나 인육을 먹는 형편이 되었다.


이윽고 몽골군이 중도로 접근하자 성문은 닫히고 파수병들은 방어태세로 들어갔다. 성안의 몽골 특수부대원들은 각 지역으로 흩어져 민가에 금나라군의 방어용 무기인 살상용 불기름으로 불을 놓기 시작하였으며 몽골군이 이미 시내까지 들어와 싸우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시내의 이곳 저곳에서 시커먼 불기둥이 타오르고 민심이 흉흉해져 사람들은 관가와 저자거리를 털기 시작하였다. 병사들도 자리를 이탈하여 약탈과 강도, 강간, 살인에 끼어들어 중도는 생지옥이 되었다. 절망한 중도 유수 완안복흥은 자결해버렸으며 석말진충은 부하를 데리고 탈출하여 개봉에 들어갔으나 패전의 책임을 물어 처형되었다.


거란족 출신인 석말명안은 몽골군을 이끌고 입성하였고 당시 장성의 건너편 드론 노르 호수가의 환주에서 더위를 피하며 머물던 징기즈칸은 자신의 양자인 시기 쿠두쿠를 보내 성내의 재물을 환수케 하였다. 그 뒤 중도는 한달 동안 약탈이 허용되었으며 수천명의 주민들이 죽고 도시전역이 화염 속에 소멸되었다. 당시 몽골인은 도시경제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으므로 금, 은, 보석의 약탈과 살육, 방화 등으로 도시를 파괴하였다. 10세기의 거란이나 12세기의 여진인은 최소한의 살육으로 왕조를 계승한 후 그들의 재산이 될 것은 파괴하지 않았으나 징기즈칸의 몽골인들은 무제한적 파괴만 있었다.


지금까지 금나라에 대한 몽골의 원정은 약탈전과 복수전의 성격을 띠어, 노예와 가축과 재물을 얻기 위한 유목민의 전투였다. 그러나 이제 거란과 한족출신 참모들의 영향으로 전쟁목적은 수정되었다. 징기즈칸은 금나라 황제에게 함락된 모든 영토의 할양을 요구하였고, 아직 함락되지 않은 하북과 산동의 모든 지역을 바칠 것과, 황제는 스스로 황제의 칭호를 포기하고 하남 왕일 것을 명령하였다.


황하의 북측지역은 무정부상태로 되어 대소의 무장세력이 자생적으로 일어났다. 또 중앙의 명령을 받을 수 없었던 지방의 군단들은 독립군벌로 변해갔다. 금나라의 고향 만주는 연락이 끊어져 속속 몽골에 집단 투항하였으며 몽골은 내몽골 초원과 예전 거란의 연운16주를 손에 넣었다. 금나라의 영역은 이제 그 새수도인 개봉 일원을 중심으로 섬서성의 일부 요새와 하남성 지역 정도로 축소되었다. 이리하여 금나라는 하남과 협서를 가진 지방정권으로 전락하였으며 몽골은 아시아 동방의 강자가 되었다.


징기즈칸은 이어 금나라의 왕을 끝까지 추격하여 그가 천도한 새로운 서울 하남성의 개봉까지 점령하려고 사무카를 보냈다. 그러나 개봉은 황하가 앞을 지켜 몽골의 기병으로는 정면공격할 수가 없었다. 사무카가 이끄는 몽골의 대부대는 서쪽으로 크게 우회하여 협서성에서 공격하기로 하였다. 1216년 말부터 1217년의 겨울 사무카의 몽골 대군은 중국의 로마라는 서안과 동관의 요새를 공격하였다. 이곳은 황하와 위수가 합류하는 관문으로 2,700m 높이의 험준한 화산이 그 입구를 막고 있어 화산 밑의 좁은 계곡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이 어렵다는 것을 안 사무카는 다시 군대를 이동시켜 낙양방면으로 갔으나 절벽 등 험로로 해서 진군을 포기하고 그 대신 남쪽의 고산으로 빠져 낙양의 남쪽 성곽을 점령한 후 개봉 남쪽에 있는 평야로 진출했다.


이로서 금나라는 많은 병력을 모아 대비할 시간적 여유가 있었으므로 개봉전방 4km 지점에서 그들은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히려 곤경에 빠질 지경이었다. 다행히 황하가 얼어 먼길을 우회하지 않고 그대로 강을 건너 회군하였다. 금나라는 이때부터 몽골군이 확보하고 있던 북경지역을 제외한 여러 성의 상당 부분을 수복하였다.

한편 무칼리는 요동으로 진격하였다. 그것은 거란인 석말야선이 여진족의 발상지에 가까운 요동의 동경을 점령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징기즈칸에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석말야선은 무칼리 군대의 일부를 지휘하게 되었고, 동경은 1215년 경기병의 급습으로 함락되고 말았다. 또 석말야선은 북경성의 방위를 위해 새로운 지휘관이 임명되어 부임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단 2명의 기병을 데리고 신임 지휘관을 도중에 급습하여 죽인뒤, 그의 임명장을 빼앗아 성으로 들어가서 자신이 조정에서 새로이 임명한 지휘관이라고 하였다. 그는 초병들을 철수시키고 새로운 군관을 임명하였다. 그로부터 사흘 뒤에 무칼리는 무혈입성하여 10만8천을 헤아리는 민호와 10만명의 병사, 그리고 수많은 군량과 무기를 손에 넣었다. 이어서 오고륜, 인답호 등을 비롯한 47명의 장군들 및 32개의 성읍이 투항하였다. 이로서 무칼리는 투항한 거란족 및 여진족, 한인 무장 군벌들을 앞세워 지방자치와 같은 분할통치를 실시했다.


1211년부터 1215년까지 햇수로 5년에 걸친 금나라 침략은 몽골인에게는 거국일치의 전쟁이었다. 몽골제국 성립 후 이 작전으로 유목민들은 자신들이 대몽골국(에케 몽골울루스)의 백성이란 의식을 갖게되었다. 잡다한 유목민들을 모아 원정 6년 동안 단체생활을 통해 이들 유목민들이 몽골이라는 공통의식을 가지게 하였다. 또 자체 기술개량은 물론 선진기술 도입, 외국인 기술자 활용을 통해 전쟁 관련기술이 크게 향상되었다. 즉 몽골군은 투항한 금나라 야전군에게서 투석기나 대포, 초보적인 로케트 등 선진 공성 기술을 전수 받음으로서 호라즘 원정 때에는 한 차원 높은 전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징기즈칸의 금나라 원정은 1211년에 시작되어 짧은 휴지기가 있었을 뿐 그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으며(1227년), 그의 후계자 시대에 이르러서야 결말이 났다(1234년). 그 주된 이유는 몽골군은 기동력 있는 기병들로 지방과 무방비상태의 도시들을 파괴하는 데는 뛰어났으나, 중국인 공병들이 지키는 성채를 빼앗는 기술은 오랫동안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들은 중국원정을 초원에서처럼 수행하였으니, 계속 공격하고도 전리품만 갖고 철수했기 때문에 금이 도시를 재점령하고 갈라진 성벽과 보루를 수축하여 요새를 재건할 만한 시간적 여유를 주었다. 그런 상황에서 몽골은 어떤 요새는 두세 번 다시 점령하여야 하였다. 몽골군은 적을 대량으로 학살, 추방하거나 집단적으로 징집하였는데 학살된 자들보다 그 자리를 차지할 주민들이 항상 넘친 북중국에서는 대량학살이 별 효과가 없었다.


똑같은 군사행동을 거듭해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된 징기즈칸은 중국에 있어서의 군사행동 일체를 무칼리한테 일임, 그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해 1217년의 가을 그에게 국왕 칭호를 내렸다. 징기즈칸은 금나라와 싸울 때 변절한 한족을 동원하고, 금나라에 밀려난 거란족 무장집단의 자발적인 협력이 있으면 많은 몽골기병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징기즈칸은 금나라에 대한 뒷일을 국왕 무칼리에게 맡기고 화약무기 진천뢰 등이 포함된 막대한 전리품을 가지고 몽골로 철수했다. 징기즈칸은 원래부터 정착민의 황제를 꿈꾼 적이 없었으며 그보다는 초원의 유목민인 투르크족과 페르시아인의 카간이 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이제 징기즈칸은 투르키스탄 정복을 위하여 병력의 대부분을 철수시켰고, 그가 떠난 뒤로 그의 장군들은 금나라의 군대를 격파하였으나 금나라를 붕괴시키지는 못하고 지구전을 할 수밖에 없었다. 금나라는 정예군단만 해도 최하 50만을 거느린 정착문명의 제1 대국이었고 몽골제국은 그때까지 겨우 10만의 기마병뿐이었다. 게다가 여진인인 금나라는 겨우 100년 전에 정주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수렵민의 피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따라서 공성전에 익숙치 못한 몽골인들은 중국인 공병들의 기술뿐 아니라 여진족 전사들의 용맹함에도 저항을 받았기 때문에 어려움이 배가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금나라군은 자기들이 주둔한 곳만을 무대로 했고 몽골군은 전력을 아껴가며 금나라 군대의 일부를 선택해 싸웠다.


북중국에는 한인이 인구도 많고 경제, 문화면에서 압도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1213년 몽골의 침입에서 한인 사씨 일족이 몽골측에 가담하였다. 한인을 자기편으로 둘려고 하는 외교전의 승리자가 몽골제국이었다. 몽골군이 북중국에 침입하자 지방 유지인 사병직은 가족을 모아 상담하였다. “국가는 소란상태에 있는 이때 우리 가족 100명은 어떻게 자위할 수 있는가. 몽골은 항복하는 자는 벌하지 않는다고 들었으므로 귀순하자.” 그는 같은 마을의 노인과 어린이 수천명을 데리고 칸의 군영을 찾았다. 사병직은 노인이었으므로 장자 사천아가 일족을 통솔하게 되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원근에서 참가한 자들이 십여만 가구에 이르렀다. 사씨 일가는 대대로 의리를 중히 여기고 재산을 가볍게 보는 것을 가훈으로 하여 토착민의 절대적인 신망을 얻었다. 사천아의 모집에 응하여 1만명의 젊은이가 모였으므로 이것을 의용군으로 조직하여 몽골군에 협력하게 하였다.


사천아는 징기즈칸을 배알하여 당면한 여러 문제에 대하여 의견을 개진하였을 때 칸은 모두 동의하였다. 또 그때 무칼리가 국왕이란 칭호를 받아 대금작전의 최고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몽골 중로군을 지휘하였다. 사천아는 그에게도 한마디하였다. “지금 중원은 거의 평정되었다. 그러나 몽골군이 가는 곳에는 약탈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은 왕자다운 사람이 백성을 불쌍히 여겨 죄를 사하는 뜻에 반한다. 또 국왕은 칸의 명령을 받들어 천하를 위하여 횡포한 것을 없애는 입장에 있다. 그러나 이와 같아서는 횡포를 가지고 횡포에 답하는 것이 되지 않는가? 인민을 귀여워해 주는 것은 왕자의 책무이다. 그것을 하지 않는 자의 몰락은 빠르다.” 이후 사천아는 항복해온 금나라 장군의 배반으로 살해되어 동생인 사천택이 뒤를 이었다. 사천택은 징기즈칸 이후에도 오고타이나 쿠빌라이에 봉사하여 몽골의 중국지배에 힘을 바쳤다. 


1216년 고비 북쪽으로 돌아온 징기즈칸은 몽골군을 둘로 나누어 한 부대를 이끌고 서쪽을 향하게 되었다. 참모장격의 야율아해는 징기즈칸과 같이 서쪽으로 가고 동생인 야율독화는 무칼리의 부장이 되어 동쪽으로 각각 나뉘었다. 징기즈칸은 잘라이르족 출신의 노장군 무칼리에게 태사, 국왕의 칭호를 주어 5투하라고 부르는 5개의 유력 부족집단 (잘라이르, 콩기라트, 이키레스, 우르우트, 망구트)을 위시하여 좌익중 24개의 천호와 새로 편성된 거란군 20개의 천호를 배속시켜 중국방면을 위임하였다. 몽골 정규군은 전체 병력의 절반인 2만 3,000명이고 나머지는 같은 수의 거란계 보조병이었다. 무칼리는 부족한 이들 병력을 이끌고 1217년에는 징기즈칸이 점령하지 못한 하북 남부의 거점 대명을 일시 탈취하였다. 또 1218년에는 산서의 도읍인 태원과 평양을 금으로부터 탈환하였고, 1220년에는 산동의 도읍인 제남을 탈환하였다. 그해 그의 부장은 황하 북부에 있는 하남성 창덕을 점령하였다.


무칼리는 1221년에 보안, 부주를 비롯한 섬서북부의 도시들을 빼앗고, 1222년에는 위수 남쪽 섬서의 옛 도읍 장안을 손에 넣었다. 1223년에 그는 황하 만곡부와 산서의 남서쪽 끝에 있는 중요한 요새인 하중(포주)을 기습 공격하여 빼앗았으나 기진하여 사망하였다. 무칼리는 중국에 대한 책임을 지면서부터 기병 외에 보병, 포병을 고용하여 조직적인 점령에 힘을 기울였으며 1223년 4월 사망할 때까지 몽골에 대한 탕구트와 금나라의 대규모 저항을 막아내는데 커다란 공을 세웠다. 이 7년 동안 끊임없는 전쟁 끝에 그는 금나라를 다시 하남성에 가두었다. 그가 죽은 뒤 하중은 다시 금으로 넘어갔다. 그리하여 인구가 과밀하고 천연의 요새로 꽉 들어찬 북중국의 전투는 끝없는 공성전으로 변질되었다.


출처 : 석조건물 문화유산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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